한국 속담 중에는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여자 셋이 모이면 그릇이 깨진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와 사기그릇은 밖으로 내돌리면 못쓴다" 등의 남존여비 속담들이다. 여필종부(女必從夫), 부창부수(夫唱婦隨), 미인박명(美人薄命) 등과 같은 한자어도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말들이다.
물론 대한민국은 OECD국가 중에서 남녀평등지수가 가장 낮은 국가에 속한다. 여성에게 부여되는 학교교육 기회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한국여성들은 차별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남녀차별이 잘못된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자녀에 대한 선호도에서 아들과 딸 선호도가 역전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들이나 인생말년 노인부부 모두 딸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과거와는 크게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지방에 대한 봉건적 인식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고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방자치나 지방분권 등을 통해 봉건적인 중앙/지방 종속 구조를 깨트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한국인들의 인식 속에 박혀있는 지방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깨지지 않고 있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거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의 서울 선호 현상은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다. 통일신라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뿌리내린 중앙집권 왕조체제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중앙에 부와 권력이 몰리고, 지방은 중앙의 통제와 수탈의 대상이었다. 신라의 수도 경주는 주변 지방과는 비교가 안되는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지역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수도와 지방의 차이는 매우 컸다. 중앙에 진출한 지방출신 관리가 범죄를 저지를 경우 징벌로서 고향에 보내는 "귀향형(歸鄕刑)"이 있을 정도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이 지방을 지배하는 체제였던 조선사회에서 입신양명은 과거에 합격해 중앙의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통일신라나 고려나 조선에서 나타나는 공통적 현상은 수도와 지방의 불균형이 결국 국가적 붕괴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통일신라나 고려 왕조 모두 향락과 타락에 빠진 수도거주 권력층에 대한 지방의 반란으로 결국 왕조가 바뀌었다. 조선왕조의 말년은 조금 양상이 달랐다. 조선은 과도한 중앙집권체제로 인해 지방의 자생력과 견제력이 취약해졌고, 외세의 침략 야욕에 저항할 힘조차 잃어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에 기초한 민본정치와 삼사(三司)제도와 같은 권력견제 장치 덕분에 장기간 왕조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 장수의 또 다른 요인은 중앙과 지방간의 권력균형이었다.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왕조체제였지만, 수령(守領)-향리(鄕吏)-사림(士林)으로 구성된 지역사회의 다원적 통치구조를 신축적으로 운영해왔다. 덕분에 중앙집권에 필수적인 군사력이나 교통, 통신 등의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효율적으로 지방을 통제하고 지배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 중앙과 지방간의 권력균형이 깨지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의 과도한 수탈과 그러한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지방의 견제력이 약해지면서 민생은 피폐해졌고, 그 결과 외세의 침탈을 이겨낼 힘을 잃었다.
일제 식민통치는 지방의 모든 것을 중앙에서 관장하는 형태였고, 해방이후에도 중앙의 지방지배는 지속되었다. 총독에서 대통령으로 이름만 바뀌었고, 총독부가 중앙청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군사독재 종식과 민주화 이후 제한적이나마 지방자치를 실시하고 있지만, 식민지 지배기간 동안 완전히 거세된 지방자치 문화는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디지털 첨단시대에 살고 있지만 지방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봉건주의 시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중앙의 지방지배는 아직도 진행형이고, 지방에는 중앙을 견제할 만한 힘이 없다. 중앙과 지방의 차별이 남녀간의 차별만큼 불합리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세상으로 바뀌기는 요원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