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가 추구하는 삶의 최고 목표는 자신의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어릴 때부터 철저한 인격 수련과 학문 연마의 과정을 거쳤다. 성인이 되면 과거를 통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배운 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했고, 또 벼슬에서 물러나면 향촌으로 돌아가 후학들을 양성하며 학문을 정리하는 일에 전념했다. 선비라면 이 모든 과정을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회적인 책무로 여겼다.
위 글은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 전시된 유학자의 일생이란 글귀로써 선비가 어떤 사람들인가를 정의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선비들의 철저한 인격 수련과 학문 연마의 기반이 된 것이 유학(儒學)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현실에서 실천하려고 하였기에 유학은 본질적으로 실천철학이라 할 수 있다. 선비들은 이념을 현실 속에 구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선비들은 절의를 지키고, 유교적 이상을 모색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기본적으로 개혁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선비들은 언제나 학문을 가까이하고 이를 생활에 체현하려고 한 탓에 국난을 겪거나 불의를 볼 경우, 누가 시키지도 하라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이를 극복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하였으니, 자의?타의에 의한 것이 아닌 몸과 마음이 알아서 움직일 수 있었다.
성주의 선비들도 당연히 이러한 선비들의 기본적인 성향을 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비의 고장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인물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최초의 선비라 할 고운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여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중국 대륙에 문명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그는 뒤에 신라로 돌아왔지만 골품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6두품 이상의 관직을 얻을 수 없었으며, 진성여왕 8년(894년)에는 시무 10조를 올려 과감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국제 감각을 지닌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난세의 불우한 지식인이었던 그는 결국 자신의 호 고운(孤雲)이 상징하듯 외로운 구름이 되어 가야산에 들어가 은거하였으니, 가야산을 품에 안은 성주는 이미 신라 말에 선비문화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할 것이다.
1. 성주 선비들의 절의 정신
유학(성리학)에 바탕을 둔 선비들의 절의정신은 고려말 삼은(三隱)에 의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즉 고려 왕조의 멸망과 조선 왕조의 창건이라는 역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마지막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던 대표적인 절의지사인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등 삼인이 절의정신을 제대로 표출해 내었던 것이다.
삼은의 한 사람인 도은 이숭인은 성주에서 태어나 가야산 자락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성장해서는 이색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문장력이 뛰어난 선비로서 스승인 이색이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할지라도 많이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고, 명나라 태조도 일찍이 그가 찬한 표문(表文)을 보고 "표의 문사가 참으로 절실하다."라고 평가했으며, 중국의 사대부들도 그 저술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 전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절의 정신에 바탕하여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조선의 개국에 지음하여 정도전이 보낸 자객에 피살되었으니, 성주의 선비로서 자랑스러운 인물이라 할 것이다.
명분과 절의를 중시하는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했던 조선 왕조가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이라는 이념의 혼돈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비판하고 나선 인물이 점필재 김종직이었다. 김종직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했는데, 조의제문을 지은 장소가 성주의 답계역에서였다. 단순한 우연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당시 성주의 선비정신이 준엄했기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라 할 것이다.
결국 조의제문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의 구실이 되어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무덤을 파헤쳐 송장의 목을 베는 형벌)되고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던 제자 김일손도 참수되었으며, 정여창, 김굉필은 귀양을 가는 등 많은 사림들이 희생되었으니 이는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절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성주 선비들의 절의 정신은 외적의 침입에 처해서는 의병으로 표출되었으니, 임진왜란을 당하여 박이현, 배상룡 등 다수의 성주지역 선비들이 직접 무기를 들고 의병을 조직하여 창의 기병했던 것은 절의 정신의 발현된 결과라 할 것이다. 또한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자 자하 장기석 선생과 같은 지사는 자정순국으로서 항거하였고 심산 김창숙, 공산 송준필 같은 분은 항일 투쟁으로 절의정신을 실천하였다.
2. 성주 선비들의 학문적 위상
조선시대 성주는 경상도를 낙동강을 중심으로 좌·우도로 나눌 때 낙동강의 오른쪽으로 경상우도에 속하나 그 지역적 위치로 말미암아 경상 좌·우도의 접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적인 특색은 조선중기 이후 성주의 학문적 성격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즉 성주는 좌도의 이학적(理學的)인 전통을 앞세운 퇴계학파와 우도의 실천과 실용을 중시하는 남명학파의 사상이 함께 공존하는 특별한 지역이었다.
조선중기 성주를 대표하는 대학자인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는 퇴계와 남명의 두 사문을 동시에 출입하였으며, 두 사람의 배출은 이후 성주가 영남학파의 중요한 근거지의 하나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한강 정구는 오건·퇴계·남명의 문하를 차례로 출입하면서 학문을 닦았으며, 광해군 초 정인홍과의 절교로 퇴계학파에 편향되었고 또 조목·김성일·류성룡 등 퇴계의 중요 제자들보다 가장 늦게까지 생존해 있었으므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으며, 또 그 거주지가 경상 좌·우도의 중앙인 성주에 있었으므로 퇴계·남명 양 학파를 융합하는 새로운 기점을 마련하게 된다. 특히 17세기 전반 성주일대는 한강과 여헌에 의해 소위 `한려학파`가 형성되었으며, 이들은 퇴계 이후 뚜렷한 학문적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안동권을 대신하여 영남의 학문적 분위기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구는 서울 출신의 미수 허목을 제자로 둔 데서 그의 학통은 영남의 여헌과 근기지방의 미수로 계승되어 갔다. 즉 한강의 생존시 성주는 영남학파의 중심으로서,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인 퇴계·남명학파를 통합하여 그 학통이 여헌과 미수를 중심으로 전자는 성주·인동에서 경주권으로 확대되어 갔고, 후자는 서울근교를 기반으로 하는 근기학파를 확립시켜 나갔던 것이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한주 이진상은 일찍이 숙부인 응와 이원조의 교훈으로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당시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묘충록을 저술하여 제도개혁을 염원하였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위정척사에 뜻을 같이하여 글을 지어 고을에 돌리기도 하였다. 그의 문인록에는 모두 137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그 수는 많지 않으나, 흔히 `주문팔현(洲門八賢)`으로 일컬어지는 제자들인 곽종석, 이승희, 허유, 이정모, 윤주하, 김진우, 장석영, 이두훈 등은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의 학풍을 이끌던 학자들이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한주학파가 형성되었다.
3. 독립운동으로 승화된 선비정신
성주 선비들의 선비정신은 나라가 기울어 일제강점에 이르면서 독립운동으로 승화되었다. 한주 이진상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던 `주문팔현` 들은 유림단독립운동(속칭 파리장서 사건)을 주도하였고, 한주 이진상의 아들이기도 한 대계 이승희는 노구를 이끌고 국외로 망명하여 국권의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계의 제자인 심산 김창숙은 유림단독립운동에 깊이 간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1962년 서거하기까지 올곧은 선비로서 불의를 배격하는 선비정신을 견지하여 격동의 우리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오면서도 죽는 그날까지 절의와 지조를 지켰으니, 마지막 선비로 칭해지기도 했다.
특히 심산 선생은 독립운동을 벌이다 재판에 회부되자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해 살기를 구하지 않겠다면서 변호를 거부하였으니, 이는 조선 선비의 지조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는 대구감옥에서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고, 두 아들까지 항일투쟁의 제단에 바치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선비의 기개를 꺾지 않았다. 심산 선생은 해방 후에도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을 초래하는 단독정부 수립을 비판했으며,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