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정복을 꿈꾸던 일본은 1930년대 초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군대위안부를 동원했다. 한반도 강탈을 넘어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군들의 점령지의 부녀자 겁탈 등 범행이 잦아지자 도입된 제도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에는 한국·중국·태국·필리핀·네덜란드 여성 등 닥치는 대로 끌어모았다. 회유, 강제, 납치, 취업 속임 등 동원수단마저 사악했다. 위안부는 말이 그렇지 강제된 성노예(forced sex slave)였다.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20개월에 걸친 방대한 자료조사와 16명의 위안부 피해자 면담 결과를 토대로,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담화에서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고,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감언과 강압에 의해 모집되었으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허다한 고통과 심신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하면서 "우리는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동일한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표명한다"고 했다.   일본 패전 50주년이던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줬다"는 것을 인정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이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머리 숙여 용서를 구했다.   통한의 일제 식민지배와 종군위안부·강제징용에 대해 사죄한 고노담화와 무라야마담화가 근근히 한·일 관계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 되어왔다. 그동안 한·일 두 나라가 아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발전시켜올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담화 등을 통해 식민침략을 반성하면서 미래로 나가고자 했던 역사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베 총리는 "침략에 대한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져있지 않다"며 무라야마담화에 의문을 제기한 데 이어, 고노담화마저 수정해야 하느니 검정하겠다고 했다. 위안부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사안이다. 가녀린 소녀들이 참혹하게 짓밟힌 사연에 누구나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 국제 사회의 따가운 눈총과 손가락질을 받으며 오바마 대통령이 주선하는 한·미·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고노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고 언급했지만, 한편으로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고노담화의 근거가 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에 대해 검증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면서 위안부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무슨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이율배반이며 자기모순인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은 전범재판 기록 등 수많은 문서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오죽하면 보다 못한 일본 지식인들이 나섰겠는가? 하야기 히로후미 간토가쿠인대학 교수 등 15명의 학자가 주축이 된 `고노담화의 유지·발전을 요구하는 학자공동성명`에 서명한 일본 학자가 1300명을 넘었다. 이들은 고노담화 검증에 반대하며 고노담화의 정신을 구체화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독도는 4세기 삼국시대부터 우리 땅으로 되어 있다. 1454년 `세종실록 지리지`를 비롯해서 여러 문헌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증명하고 있다. 지리지 `강원도편`에는 `于山 武陵 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則可望見`이라고 씌여 있다. 즉 울릉도(于山島)와는 별도로 하나의 섬이 있고, 이곳에서는 독도가 武陵島로 되어 있다.   일본 메이지 정부가 1877년에 내린 `태정관 지리`에도 `울릉도와 그 외 1개 섬인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을 밝히고 있다. 이는 `鬱陵島爭界(일본에서는 竹島一件)`의 결론에 따라 1696년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한 결정이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증언으로는 1978년 6월 5일 일본 중의원 상공위원회에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한 후모토 다다시가 "도쿠카와 쓰나요시(1680-1709) 시대에는 죽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후에 메이지 정부 역시 도쿠카와 쓰나요시 시대의 생각을 계승했다"라고 발언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최종편집:2025-07-11 오후 04:4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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