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태종 무덤인 북능(北陵)옆 요령우의빈관(遼寧友誼賓館)에 여장을 풀다. 5월 14일 금요일부터 2박 3일간 중국 심양에서 서울의 모 인사가 중국 사법청으로부터 인가 받은 동보법률사무소의 운영방안에 관한 사업설명회에 참여하기로 해서 사법연수생인 후배와 같이 아침 일찍 출발해서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경남에서 참가한 모 변호사가 먼저 수속을 밟고 있었다. 대한항공 라운지에 들러서 빵 하나 먹고 중국동방항공 cz682편을 탑승했다. 심양은 랴오닝성의 성도(省都이)고 동북(東北 - 중국 동북부에 위치한 요녕성, 흑룡강성, 길림성 3성을 일컫는 지역임) 최대의 공업도시이며, 인구는 약 700만명 정도로 중국 4대 도시중의 하나이다. 옛이름은 봉천(奉天)이고, 랴오허강(遼河) 유역에 있다. 일찍이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개발되어 한대(漢代)에는 요동군(遼東郡)에 속했고, 뒤에 고구려(高句麗)의 영토에 속해있기도 했다. 청조(淸朝)가 일어나자 1625년 랴오양(遼陽)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1644년에 베이징을 국도로 정한 뒤에는 이곳을 배도(陪都)로 삼았으며, 19세기 말에 러시아와 일본의 둥베이(東北) 침략이 시작되자 심양은 침략의 목표가 되고, 러일전쟁(露日戰爭: 1904 ~1905)때도 공격의 목표가 되었다. 1931. 9. 18. 일본관동군의 조작으로 만주사변이 일어난 유조구(柳條溝)가 위치한 곳이다. 청조가 멸망하자 둥베이는 지방 군벌(軍閥)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고, 심양은 그 두목 장쭤린(張作霖)정권의 본거지가 되었다. 1932년에 일본에 의해 ‘만주국(滿洲國)’이 건국되면서 도시명이 봉천시(市)로 개칭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 후 만주국이 붕괴되자 지명이 다시 심양으로 바뀌었으며 창춘(長春)]·다롄[大連]·산하이관[山海關]·단둥[丹東]·지린[吉林]으로 통하는 주요철도가 분기하여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청태조 누루하치와 2대 황제 청태종의 무덤이 있고, 초기의 청나라 궁전이 남아있는데 그것을 10여배로 확대한 것이 북경의 자금성이라 한다. 신의주에서 가까워서 일제시대에 우리 조선인이 많이 이주해서 살았고, 어릴적 “만주 봉천에서 개장사하다 왔다”라는 말을 많이들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심양이 가까워지면서 기내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야트막한 야산이 펼쳐진 산악지대를 지나 골짜기 물이 한군데 모여서 자연적인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어 있었다. 곧이어 끝이 없는 평야지대가 이어지는데 농작물이 아직 자라지는 않고 이제 옥수수 씨 등을 파종해놓은 것으로 보였고, 비닐하우스 등은 보이지 않았다. 기내방송에서 현지 날씨는 맑고 기온은 25℃정도라고 했다. 현지 동보법률사무소 대표와 조선족 류영란씨가 봉고차로 마중을 나와있었고 서울 로고스법무법인의 중국담당 모 변호사와 합류했다. 시내까지 약 40분 걸려 왔는데 강을 기준으로 해서 강남 지역에는 한창 개발이 진행 중이었고, 한국기업에서 고층아파트 5,000세대를 건축 중이었고 한글로 “심양 방문을 환영한다”라는 플랜카드와 LG전자공장과 삼보컴퓨터 현지공장도 보였다. 숙소인 요령우의빈관(遼寧友誼賓館)은 시내를 통과해서 북쪽에 있었는데 청의 2대 황제 무덤인 북능(北陵) 안에(참고로 청태조 누루하치의 무덤을 동능(東陵)이라 불렀다) 숙소를 만들었는데 예전에는 중앙정부에서 시찰 온 공산당 간부숙소로 사용되는 곳이었고 현재도 성정부 (省政府)에서 관리하는 곳으로 지금까지 10여명의 국가수반이 다녀갔고 모택동, 김일성 등이 묵은 곳은 비품을 그대로 보존해두고 1년에 한번씩 개방한다고 한다. 주변에 큰 호수와 수영장, 국제회의장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15개의 별채 건물로 나눠져 있는데 우리가 묵은 곳은 1호관으로 회의센터 안에 있는 간이숙소였다. 샹들리에 등 장식은 전혀 없었고 숙소내는 비교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냉장고 안에는 비치된 음료수가 전혀 없었다. 2. 동보법률사무소 방문 및 중국변호사들과 만찬 일단 여장을 풀고 동보법률사무소 건물로 갔는데 26층 건물 중 24층에 위치해 있는데 LG, 삼성 등의 지점이 설치된 중심가의 큰 빌딩이었다. 도로변의 기존의 아파트를 헐고 대형업무빌딩을 지어서 오피스건물이 늘어선 거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1년도 못되어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큰 빌딩이 줄을 이어서 들어서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업계획 등을 설명받고 중국변호사들과 만찬을 위해 사천요리 전문점으로 갔다. 1, 2층 큰 홀안에 발디딜틈도 없이 많은 손님들이 중국인 특유의 시끄러운 소리로 벅적대고 있었는데 종업원들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중국인 변호사 세명이 나왔는데 대개 30전후반의 젊은 사람이었다. 북한에 대해 냉소적으로 북한이야말로 막스레닌주의 진정한 신봉자라고 하며, 요즈음 북한이 경직된 사회주의 속에서 김정일 뺏지를 달고 다니면서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하면서 개방지역인 나진지역에 간 적이 있는데 북한 여자가 제발 좀 중국으로 데려가서 살게 해 달라고 소위 세컨드를 삼아달라고 졸랐다는 말을 듣고 보니 민족적 자존심이 상했다. 자기들도 문화혁명이라는 암흑기를 겪은바 있어서 현재의 북한 실정을 잘 이해할 수는 있는데 아마 북한도 중국이 그랬듯이 지금 시기를 지나면 지난 과거를 엄청 후회할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정치얘기를 체제문제 등 아주 깊숙이 했는데도 전혀 거부감이 없이 진지하게 토의가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축구문제에는 중국인의 인구와 남한 인구를 비교해봐도 정말 불가사의하다면서 앞으로도 수년간 중국이 한국을 이길 수 없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중국과 한국과의 무역거래와 투자가 활발하니 양국 변호사가 협조해서 법률수요에 잘 대처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내일은 자기들이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3. 한국인 거리인 서탑거리에 가다. 음식은 너무 매워서 거의 먹지 못하고 마지막에 나온 오리혓바닥 요리와 개구리요리를 처음으로 먹었다. 만두를 좀 먹고 나와서 서탑이라는 한국인 거리로 가서 한국인들끼리 맥주를 한잔하기로 했다. 궁의 외곽 사방에 탑을 세웠는데 서탑이 있는 곳으로 봉천역에서 가까워서 옛날 조선인들이 신의주에서 기차를 타고 요즈음 북한의 용천폭발 사고로 널리 알려진 단동역에 내리거나 봉천역에 내려서 어려운 중국생활을 해왔다는데 완전히 한국인 간판 위주이고 심양시내 어느 곳보다 거리의 조명이 많아서 밝고 활기가 넘쳤다. 심양시 인구 700만 중 조선족은 8만정도 밖에 되지 않으나 한국인 주간이라는 행사도 열리고 성공한 조선족들이 많아서 앞으로도 가장 번성할 곳이라고 했다. 중국인들은 밤 10시가 안되서 다 귀가하는데 서탑거리만 한국인들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5,000cc 맥주 2통을 시켜먹으면서 개척자 정신으로 중국법률시장을 개척해보자면서 건배를 거듭하다 보니 한국시간으로 12시가 넘어서 택시를 타고 숙소인 우의빈관으로 왔다. 더블침대 위에 혼자 자려고 하니 아내도 같이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1637. 1. 30. 조선의 인조임금을 삼전도에 꿇어앉히고 머리를 조아리게 까지 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끌고 온 청나라 황제 무덤 안에 위치한 우의빈관에서 잠을 자는 것이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했다. 이렇게 광활한 평야지대에서 평안히 살면 될 것이지 무슨 세를 과시한다고 조용히 살고있는 조선에까지 가서 무자비한 살육을 일삼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세계최장의 석회암동굴 유람 어제 늦게 잤는데 7:30분에 모이기로 했으니 한시간 빠른 한국시계로는 8:30분에 알람을 맞추어야 하는데 오히려 한시간 빨리 6:30.에 해놓는 바람에 예정보다 2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1호관에 있는 식당에 가니 역시 지난번 북경에서와 같이 만두, 빵과 죽만이 입에 맞았다. 2시간 걸린다는 본계에 있는 물이 흐르는 석회암동굴(本溪水洞窟)에 가는데 도로가의 시골마을은 온갖 쓰레기가 버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머리도 며칠 안감은 우리의 60~70년대 수준의 용모였다. 앞에 가는 차가 계속 석탄가루를 떨어뜨리고 가고 비포장도로라서 먼지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인데도 워낙 익숙해서인지 사람들은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었다. 길가에 펼쳐진 시골장터에 들렀는데 돼지고기 등을 좌판에 그냥 팔고, 생선은 그냥 소금에 찌들어서 보기만 해도 짜서 먹지 못할 것 같았다. 도로공사중이라서 우회하는 바람에 무려 4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해서 모두가 지쳐있었다. 1인당 15,000원씩의 입장료를 주고서 길이가 3km이나 되는 거대한 세계 최장의 석회암 동굴을 배를 타고 돌아다니는데 40분 이상이 걸렸다. 온갖 현상의 종류석이 있었고 그 규모가 엄청났는데 배가 지나가면서 사람머리에 닿을 염려가 있는 것은 곳곳에 잘라버린 흔적이 있어서 아쉬웠다. 돌아오는 길은 길가에 조금 깨끗하게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서 산채와 냇가에서 잡은 고기튀김 등 8가지 요리로 8명이 식사하고 한국돈으로 30,000원 가량을 지불했다. 식사가 나오기 전 “우의빈관을 아침 일찍 떠나서 이리 저리 헤매다가 반나절이 지나 본계 수 동굴에 썩 들어서니 웅장한 종류석과 우뚝 솟은 대석순 석가상 마리아상, 만물상은 천지조화가 아니냐 이리보고 저리 보아도 볼수록 아름답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로 가사를 즉석에서 지어 정선아리랑을 한곡 불렀더니 일행으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동하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석회암동굴 보고 오는데 하루가 거의 가버렸다. 5. 북한음식점 모란각에서 만찬을 즐기다 다시 동보법률사무실에 모여서 어제 다 못했던 앞으로의 사업계획에 대해 서로 합의를 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서탑거리에 있는 북한에서 운영하는 모란각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김치와 명태전등이 먼저 나왔는데 맵거나 짜지 않고 먹기가 괜찮았다. 개고기(북한 용어로 단고기)와 처음 먹어보는 비둘기요리를 먹고 나서 평양냉면과 온반을 주문하여 청도맥주와 북한 술로 반주를 했는데 북한의 김광희 아가씨와 손을 잡고 사진을 찍는 등 분위기가 익어가고 아가씨들이 아침이슬, 반갑습니다, 홍도야 울지마라 등을 부르기도 하고 가야금을 연주하고 단지를 이고 춤을 추는 등 모두 한가지 이상의 솜씨를 선보였다. 특히 김선경이라는 아가씨는 우리 일행중 한사람이 사귀고싶다고 하니 아저씨는 너무 늙어서 안된다면서 자제분을 소개해달라고 하더니 바로 “시아버지 술한잔 쳐 올리겠습니다”라면서 술을 권하고 농담도 아주 잘했다. 텔레비전 만담 프로에 나오면 되겠다고 하니 북한에는 자기보다 잘생기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 많고 자기는 수준이 많이 밑이라면서 겸손해 했다. 대학은 관광학과를 나와서 호텔에 근무했으며 여기 온지는 2달이 되었고 평양고려호텔 앞에 자기 집이 있다고 했다. 박수치고 흥을 내다보니 더워서 에어콘을 켜달라고 했는데 못알아들어서 에어콘을 가리키면서 “저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하니 “냉풍기라고 해야 알아듣지요”라고 했다. 아가씨나 지배인이나 모두가 자주 오라는 인사를 깍듯이 하는 등 완전히 자본주의 정신이 배어있었다. 저녁 12시가 다 되어서 현지에서 살고있는 친구 원익이가 고맙게도 숙소에까지 찾아와서 그동안 맨몸으로 나와서 어렵게 헤쳐나온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지고 지금 이렇게 여행기를 마무리하고 있는 시간이 새벽 1시 25분이다. 여기서 몇년전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감명 깊게 읽은 동북군벌(東北軍閥)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의 인터뷰 기사를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군벌 장작림이 1928년에 일본 관동군에 이해 폭살 당했는데 그의 아들 장학량이 국민당 정부의 동북군부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공산당과의 동족상잔에 회의를 느끼는 것을 장개석이 눈치채고 공산당토벌 독려차 서안에 내려왔다가 장학량에 의해 감금당하여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선언한 것이 1936. 12. 12. 일어난 서안사변이다. 그때 장학량은 곧 장개석을 풀어주고 동시에 친히 국민당 정부가 있는 남경까지 배웅함으로써 장개석의 지도자로서의 위신을 지켜주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공산당 주은래(周恩來)가 장학량의 남경행을 만류하기 위해 비행장에 급히 왔으나 장학량은 이미 떠나고 없었고, 그때 주은래는 하늘을 향해 “장 부사령관이여!”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장학량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후 특사를 받았으나 국민당을 따라 중국 각지로 끌려 다니다가 1949년에는 대만으로 압송하여 장개석과 그 아들 장경국이 사망 후 90년대 초반에야 석방되어 1936년부터 무려 50년이 넘게 연금당했다. 1994년에 장학량의 나이 94세에 처음으로 서안사변을 언급하면서 기자가 “어쨌든 장군께서 장개석을 남경까지 배웅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 아니냐”고 하니 “난 군인이요, 내 스스로 한 일은 내 스스로 책임져, 날 죽인다해도 난 책임지지, 내가 남경에 가면 총살시켰을지도 모르지만 나라는 사람은 그래” “당시 군사법정 재판장이 말하길 과연 장학림의 아들답다고 말했거든”이라고 답변을 했다. 우리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라는 속담이 중국어로는 ‘有其父 必有其子‘이다 2004. 5. 16. 새벽 1시 25분 중국 심양시 우의빈관 1021호실에서
최종편집:2025-07-09 오후 05: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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