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9월 진주목사 김시민이 경상남도 고성과 창원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공격하자 왜군은 고성과 창원에서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자 김해성을 지키고 있던 가토 미쓰야스(加藤光泰)와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등의 왜장이 2만여 왜군을 이끌고 9월 24일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진주성을 향해 진격해 왔다.   이에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은 3,700여 병사를 이끌고 있던 진주목사 김시민을 독려하는 한편,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있던 곤양군수(현 사천시 곤양면) 이광악과 진주판관 성수경, 전만호, 최덕량 등과 함께 2만여 왜군과 맞서 싸웠다. 이때 김시민과 이광악의 병사는 모두 합쳐봐야 3,80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이들은 2만여 왜군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숫자의 열세에서 진주성을 지킬 수 있는 방어 전략을 짜는데 힘썼다.   그러던 중 그 해 10월 6일 왜군 병력들이 진주성 주변에 진을 치고 진주성을 공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그날 저녁 의병장 곽재우가 심대승에게 200여 의병을 이끌고 마을 향교 뒷산에서 불을 지피고 호각을 불게 하였다. 이는 왜군을 속이기 위한 전략으로 수많은 조선의 지원군이 진주성에 구원병으로 오는 것처럼 꾸민 것이었다. 그리고 8일 왜군은 마침내 진주성에 대나무 사다리를 걸쳐놓고 기어 올라오며 무차별 공격을 해왔다.   이에 김시민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을 향해 현자포를 쏘는 한편 화약에 불을 붙여 성밖으로 던져 왜군들이 진주성 성벽에 더 이상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던 중 진주의 복병장 정유경이 보내준 500여명의 구원병이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9일 2천여 병력을 이끈 김준민, 정기룡, 조경형이 진주성에 도착해 왜군을 격퇴시키는데 힘을 보탰다. 이에 더해 의병장 최경희와 임계영이 이끈 2천여 명의 구원병까지 다다르면서 조선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0일 동이 틀 무렵 왜군은 한 판으로 끝장을 내겠다는 각오로 진주성의 동문과 북문을 급습하였다. 이때 김시민은 이마에 총탄을 맞아 의식을 잃었다. 이에 화가 난 이광악이 결사항전의 자세로 왜군과의 전투를 이끌었고, 결국 진영에 집중포화를 맞은 왜군은 서둘러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1차 진주성 전투는 대승을 거두면서 끝이 났다.   왜군 2만명과 대적할 수 없는 숫자적으로 매우 열세에서 시작된 싸움이었지만 방어 전략을 야무지게 짜고 때 맞춰 도착한 구원병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두면서 끝이 난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일컬어질 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그러나 이때 부상을 당한 김시민은 끝내 죽고 말았다.   이렇듯 치열한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배무범은 형 배문범과 함께 창의하여 참전한 것이다. 이때 배무범은 옷을 찢어서 만든 깃발에 혈서로 "모든 군자들이여, 어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것을 생각지 않는가!"(백이군자, 합념순국 : 百爾君子 念殉國)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비장한 각오로 왜군과 맞서 싸우기를 맹세하였다.   그리고 배무범은 선봉에 서서 빗발치듯 쏟아지는 왜군의 화살을 뚫고 들어가 왜군 6급을 베는 등의 전공을 세워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세운 배무범과 그의 형 배문범의 공적은 경상우도감사 김성일과 도원수 권율의 장계로 조정에 알려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향리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창의하여 왜군과 맞서 싸우며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한 두 형제의 전공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배무범은 물론 후손들까지 향리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이에 더해 배무범에게 특별히 사복시정에 제수하였고, 얼마 후 다시 병절교위 호분위좌부장에 임명하였다.   현재 배무범이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활약한 전공에 대한 기록은 충훈록과 경산읍지 등에 실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통해 배무범이 나라에는 충을 이루고 가문의 명예를 회복시킨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배무범의 임진왜란 때의 활약상은 제1차 진주성 전투 이외에는 더 이상 확인 할 수 없다. 이는 그와 관련된 자료들이 대부분 병란 등으로 인해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배무범의 임진왜란 때의 공적은 충훈록과 경산읍지에 실린 자료 만으로도 그의 행적을 세상에 알리는데 결코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1909년 배우범의 6세손인 배인석이 배무범의 실기 및 유문을 모아 2권1책으로 편집 간행한 사복공실기(司僕公實記)가 있다. 그 내용 중 권율 장군이 보낸 제문을 소개하고자한다.   성산배공을 영결하는 전날 밤에 권율은 삼가 약간의 제수를 갖추어 영위 앞에 드리오니 신령이 있거든 흠향 하소서 그대의 청렴결백한 절개 온 누리에 펼쳐있고 단단한 뿌리, 예리한 무기를 시험한지 석 달 만에 오랑케 무리가 이 나라를 유린하여 한지경이 공포에 떨 때 형제가 함께 의병을 일으켰네 촌기를 들고 절개를 세워 맹세한 말씀 당당하였고 손가락의 피를 내어 쓰신 혈서가 아직 빛나니 영남을 고요히 둘러보아도 그대와 같은 남자 몇 사람이나 되랴! 옛날 당나라의 고경이나 송나라 천상도 다 같이 부끄러워 하였으리, 어리석은 나 또한 타고난 천성이 크게 부기(附驥)에 비겼더니 애석하고 슬프도다.   뒤따르는 자 몇 사람이 던요! 그대 홀로 마침내 큰절의 이루었도다 슬프고 원통하다. 그대와 내가 분수는 다르지만 기미(뜻)는 한가지였는데 어쩌다 황천이 불우하여 그대 홀연 가시었으되 높이 든 깃발 나부기고 의병들의 부릅뜬 눈을 신령께서는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아 슬프도다 부디 제물을 받으시옵소서!   저는 왜 저희 선조의 업적 중 임진란에 관한 사항을 전하려고 하는 이유는 전란에서 활약한 성주에 본(성산)을 둔 가문이 있다는 것과 명랑이라는 영화를 통해 많은 국민들이 임진란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는 이때에 2년전 2012년은 임진전쟁이 발발한 1592년부터 420년이 되는 해이다.   1주갑(周甲)에 해당하는 60년이 일곱 차례 흐른 7주갑의 세월이 지났으나, 이에 걸 맞는 학술대회 등 우리 성주에서는 아무런 행사도 없이 지나감을 안타깝게 여기던 중 뜻있는 분들이 국가의 전통성과 정체성을 크게 위협 당한 임진란의 위기 상황에서 국난을 극복하는데 지도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 등의 업적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하여 위업을 추모하며 관련 문화유산을 발굴 전승하여 우리민족 고유의 정체성 확립과 정신문화의 육성 발전에 이바지하자는 취지로 임진란 정신문화 선양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임진란에 대해 널리 알리는데 노력 하는 것은 물론 자료 발췌에 더욱 정진하고자 한다. *부기 : 후배가 선배의 뒤를 따라서 명성을 얻는 것을 말함
최종편집:2025-07-11 오후 04:4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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