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 장군의 행적이 왜곡·오도된 것을 보고 필을 들었습니다. 배설 장군은 칠천량 해전서 용감히 사력을 다해 싸웠으며 포위망을 뚫고 조선수군들과 원균 장군과 더불어 전멸될 순간에도 전략적으로 12척의 전선과 1천여명의 병졸을 구하였습니다. 원균 장군은 칠천량 해전 통영 춘원포에서 전사했습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께서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 받아 한산섬 본부에는 군사도 전선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배설 장군께서 12척의 전선과 1천여명의 병사들을 이순신 장군께 내어주셨습니다. 당시 배설 장군은 수질이란 병이 심하게 도져서 병가를 내어 육지로 올라 왔으며, 이순신 장군의 병영에 친동생을 두고 사력을 다하여 나라를 지켜라 명하고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교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연유로 권율 장군에게 육지에서 참형을 당했습니다. 영민한 배설 장군이 전략적 후퇴를 하며 본인 목숨과 많은 병졸과 12척의 전선을 사수하여 숨겨 두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 통제사로 돌아왔지만 병사들도 없고 배 한 척 없었습니다. 그때 배설 장군이 12척의 배와 1천여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감격하고 고마웠겠습니까? 선조는 바다에는 남은 것이 없으니 육지의 권율 장군과 합세하여 육지에서 싸우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 서쪽 바다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이틀만에 한양이 위험하고 초토화 된다며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 바다를 지키겠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12척의 전선으로 일본배 330척을 무슨 수로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의 자존과 오만을 한순간에 꺾었습니다. 일본군은 조선의 이순신 장군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으며 이순신은 하늘이 내린 신이다. 조선에 이순신이 있고 의병들이 있는 한 대적할 수도 이길 수도 없다며 겁을 먹고 전투할 의욕을 잃었다고 합니다. 1590년 조선에서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했습니다.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 통신사 일행이 돌아와 임금을 배알하면서 정사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오시는 눈알을 번득이며 전쟁을 준비하고 꼭 쳐들어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부사 김성일은 풍신수길은 생김새가 쥐 같았으며 대국과 전쟁을 벌일 위인이 되지 못합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1592년 4월 13일 전쟁이 발발하고 왜병들은 부산에서 파죽지세로 조선을 짓밟았습니다. 학봉 김성일이 삭탈관직 체포되어 가는 도중 초유사로 재임명된 것은 서예 유성룡 대감이 전시에는 인재가 필요함을 강조해 단 한 명의 신하도 내치면 아니된다고 고했기 때문입니다. 구제된 학봉 김성일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진력으로 사명을 다하다 전쟁 중 병사하셨습니다. 또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우리 조선에는 이순신만한 해전에 밝은 훌륭한 인재는 다시 얻기 힘듭니다. 재등용을 윤허하여 주십시요라고 간곡히 청했습니다. 유성룡 대감 같은 혜안을 가진 분이 계셨기에 조선이 존재했고 현재의 대한민국이 건재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선의 명정승 서예 유성룡이 있고, 배설 장군처럼 꾀가 있고 번득이는 지혜와 현실 파악을 할 줄 아는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인재도 요소요소 필요한 곳에 있어야지요. 우뚝 솟은 큰 바위가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에 몇 만년을 늠름히 버티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작은 돌 처럼 꼭 필요한 돌이 받쳐주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 조선의 수군이 회생할 수 있고 이순신 장군이 승리로 이끈 명량해전은 배설 장군 같은 꼭 필요한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정유재란 마지막 해전 노량해전에서 500척의 일본배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에 대패하여 50척의 배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악에 받친 왜군들은 조선의 이순신이 죽어야 일본이 산다며 장군의 배를 집중 공격해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셨습니다. 마지막 한마디 말씀도 이 나라를 위함이었습니다. "적과의 싸움이 시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하늘같이 알고 장렬히 전사하셨습니다. 아 슬프고도 슬픕니다.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은 신원되었습니다. 나라에서 공을 인정하여 1차 신원 1605년(선조38) 선무원종 1등공신 책득, 2차 신원 1610년(광해2) 가선대부 호조판서 증직, 3차 신원 1873년(고종10) 유림 자헌대부 병조판서 증직. 모함을 받아 불명예로 참형을 당했지만 대명천지에 옳고 바른 일을 한 분들은 다 밝혀지는 법입니다. 영화 명량이 훌륭한 배설 장군을 폄하한 것을 배씨 문중과 역사를 잘 아는 분들이 알면 얼마나 가슴아프고 통탄할 일이겠습니까. 이는 후손들에게 엄청난 역사 왜곡입니다. 영화 명량은 관객 동원도 좋지만 훌륭한 한 사람을 이렇게 매장시켜도 되는지요? 이 또한 슬프고도 슬픕니다.
최종편집:2025-07-11 오후 04:4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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