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8.15해방되던 해 4월 1일에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일본말로 곡꾸민각고)에 입학했으니 그때까지도 일제 교육인 셈이다. 그 때는 우리들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부르게 하는 노래를 창가(唱歌)라고 했다. 그러나 해방되고는 국민학생들이 배웠던 노래를 무엇이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요도 아니고 가곡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요라고만 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어쨌던 해방 후에도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했는데 그때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 중 가장 좋아했던 노래 하나가 있었다. 노래 제목은 모르겠고 가사만을 똑똑히 알고 있다.
`보리 이삭 돋아나면 종달새 간다지. 떠나가는 그 날에도 보리피리 불어주마` 곡도 분명하게 알고 있기도 하지만 이 노래만은 늙은 이 나이에도 좋아한다.
내 고향은 성주군의 10개면 중 가장 산악지대인 금수면인데 제일 오지이다. 그래서 평지인 논 다랭이보다 비탈진 밭이 많다. 지금은 그 밭들에 특수작물을 재배해서 수확을 많이 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 시절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초여름엔 보리를 수확하고 그 다음엔 콩을 심어서 가을엔 콩을 수확하는 것 뿐이었다. 그때는 한 마을에 한 두 집 말고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보리가 익을 무렵엔 덜 익은 풋보리를 솥에 쪄서 끼니를 잇는 소위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고 가을에 벼 수확을 할 때까지는 계속 꽁보리밥을 먹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보리밥이라면 진절머리를 친다. 요즘 도시의 식당가에서 건강식이며 별미로 먹어 봄직하다는 광고간판을 식당 밖 유리창에 붙여놓고 호객을 한다. 그러나 그 옛날 꽁보리밥을 많이 먹어 보았던 사람들은 보리밥을 공짜로 주어도 안 먹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나도 여름내 쌀 한 톨 없는 꽁보리밥을 먹고 자랐기 때문에 보리밥 식당에는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보리밭을 소재로 한 학교에서 배운 노래만은 이 세상 어떤 노래보다 더 좋아한다. 그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내 고장의 비탈지고 넓은 보리밭에 늦은 봄이 되면 보리 이삭이 돋아나서 알맹이가 영글게 되는데 그때의 보리밭 풍경을 이 세상 어떤 걸작 그림보다 나는 더 좋아한다. 보리이삭이 익어가는 들판에 산들바람이라도 불면 그것은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한 연초록과 노랑색깔이 적당히 배합되어서 탄성이 절로 나오는 살아 움직이는 초걸작의 풍경화가 되는 것이다. 황초록의 잔물결치는 보리의 파도, 보리밭 그림. 그것을 보는 나는 무아의 경지에 몰입되고 마는 것이다. 잔물결 일렁이는 황록색 보리 파도를 내려다보는 코발트색 창공에서 종달새가 이별이 아쉬운지 재잘거리는 노래소리! 그것은 나의 도원경(桃源境)이였다. 나는 그 순간 무아의 경지에 몰입하는 것이다. 내가 수 십 년 전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올 때 마을에서 제일 좋다는 내 밭 하나를 나와 친한 사람에게 주면서 소작료를 주지 않아도 좋으니 그 밭에만은 보리를 재배해 달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그의 집 뒷문만 열면 지척에 있는 그 밭이기에 경작하기에 편리하다며 기꺼이 승낙했다. 그리고 좋은 밭 경작하게 해서 고맙다고도 했다. 그 친구는 약속대로 그 밭에는 콩과 보리만을 재배했다. 그리고 보리이삭이 돋을 무렵에는 나는 아무리 바빠도 내 밭에 그려진 걸작 풍경화 보리파도를 감상하러 가는 것이다. 시류가 변해서 이제는 내 고향에도 아무도 보리 재배를 하지 않지만 그 밭에만은 계속 보리 재배를 했다. 그것은 그 밭을 소작하는 그 친구도 보리파도 풍경화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내가 술이라도 거나하게 취해서 보리밭 고랑을 걸으며 "보리 이삭 돋아나면 종달새 간다지..."를 부르면 그 친구도 덩달아 따라 부르고 즐거워했다. 보리밭 위의 벽공에서는 종달새가 이별이 슬픈지 지지배배하고 노래인지 슬픈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낸다. 그 노래가 끝나면 윤용하의 불후의 명작 가곡 보리밭도 불러보는 것이다. 몇 년 전 내 밭을 경작하던 그 친구가 병사했기 때문에 그의 부인이 그 밭을 경작하는데 그 부인도 건강이 좋지 못해서 부득이 보리는 심지 못하고 콩 농사만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 고향에 펼쳐진 거대하고도 걸작 명화였던 보리밭 파도 풍경화를 볼 수 없게 되어서 나는 크게 아쉬워했다. 그러던 중에 고인이 된 그 친구의 아들이 대구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어서 그의 어머니를 도와서 다시 잃었던 나의 걸작 풍경화를 찾아주겠다고 하기에 나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서 틈만 나면 "보리 이삭 돋아나면..." 노래를 신나게 휘파람으로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