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하늘은 맑고 높기만 한데 아침저녁 바람은 제법 차갑게 느껴지면서 옷깃을 여미게 한다. 라디오에서는 바리톤 김동규가 부르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들려오고 있다. 그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면서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다가 올해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끼게 되고 새
삼 지난 날이 주마등 같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서 이곳 안산으로 이사온 지가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다. 이사 오던 해에 막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으니 참 세월도 빠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족이 살고 있는 곳은 사동이라는 동네인데 예전에 수인선 협괴열차가 다니던 길이 있었고 지금은 복선전철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경전철이 다니던 길 주변은 아름다운 숲으로 조성이 되었으며 시민들을 위한 운동시설도 군데군데 만들어 놓았고 걷기 좋은 길도 잘 가꾸어져서 이름 하여 `황토십리길 이라고 부른다. 아침저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거나 달리기도하고 운동기구를 이용해서 자신의 건강을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는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각종 새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나 자신도 화실로 출퇴근하면서 집에서 전철역까지 흙냄새와 풀냄새를 맡으면서 이십여분 정도를 걷다보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이 길은 언제나 아름답다.
이곳 안산은 인구가 백만에 가까울 뿐 아니라 단원구와 상록구라는 두 개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단원구는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라는 단원 김홍도의 호를 딴것이고 상록구는 이곳이 심훈의 소설 `상록수 의 실제모델이 되는 최용신 선생이 활동하던 곳으로 그분을 기리기위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전철역이름도 상록수역이고 역 주변에 그분을 기리는 조각상과 근처에는 기념관과 교회가 있고 묘소도 함께 조성되어 있다.
황토십리길을 따라가다 보면 상록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그 옆 공터에 큰 느티나무가 몇 그루 서있고 그 아래 두개의 정자와 옆에는 평상도 하나 놓여있다. 그곳에는 점심시간이 지나고부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는데 한 두 시간 지나면 사오십 여명이 북적이면서 저녁때까지 장기와 바둑판이 벌어진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당분간 집에서 쉬고 있는 중인 나는 그곳에 있는 운동기구를 사용하기 위해 거의 매일 들리다보니 자연스럽게 장기나 바둑 두는 구경을 자주 하게 된다. 대부분 노인들이 많은 편이고 젊은 사람들도 한두 명 눈에 띄기도 한다. 바둑보다 장기 두는 사람이 훨씬 많은 편인데 대부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 같다. `장군아하면 멍군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구경하면서 훈수하는 사람들이 함께 뒤섞여서 떠들썩한 것이 꼭 어릴 적 고향마을에서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하다.
인근 아파트 단지에서 걸어오는 사람도 있지만 제법 먼데서 오는 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오기도 해서 여러 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모습도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그중에 어떤 사람은 장애로 불편한 몸인데도 휠체어를 타고 거의 매일 나와서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한다. 평소 바둑이나 장기는 물론 다른 잡기에도 취미를 갖지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 묘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장기판 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을 보노라면 그런대로 재미가 느껴진다.
바둑은 한 중 일 세 나라가 같은 규칙으로 즐기는 게임이지만 장기는 나라마다 룰이 다르다. 문헌에 의하면 4000년 전 고대 인도에서 불교도들이 살생을 금하는 교리 때문에 전쟁을 소재로 하는 이런 게임을 만들었다는 내용과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하는 기록이 있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오늘날 두는 장기의 형태는 중국의 초한(楚漢) 전을 가상하여 우리의 체질에 맞게 연구 개량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바둑의 유래는 대부분 전설에 의존하는 형편이고 사실(史實)적인 기록이나 문헌이 드물다. 요(堯)순(舜)임금시절 어리석은 아들 단주(丹朱)와 상균(商均)을 깨우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설과 농경사회에서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즐긴 기록이 있다.
장기와 바둑을 두지 못하는 나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같이 한판두자고 제의를 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정중히 사양을 해야 했다. 한번은 점잖게 생긴 어른 한 분이 내가 장기의 고수 같다면서 한수 가르쳐 달라고 해서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바둑이나 장기를 좀 배워둘걸, 마음 한 편 후회스럽기도 하다.
구경을 오래 하다 보면 말이 가는 길은 대충 알게 되고 묘수도 조금씩 보이는 것도 같다. 포가 뛰어넘어서 상대의 말을 잡으면 차로 되받아 치기도 하고 졸 두 마리가 승부를 뒤집기도 하는 장기판은 인생의 축소판 그 자체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차분히 수를 읽으며 치밀하게 임하는 사람도 있고 마구 소리를 지르며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장기를 두는 모습도 각양각색으로 다양하다.
옛 속담에 장기훈수는 뺨을 맞고도 한다는 말이 있는데 열심히 훈수하다가 핀잔을 듣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한다. 그런데 바둑 두는 쪽은 숫자도 많지 않지만 비교적 조용하다. 깊이 생각을 하고 신중히 돌을 놓다보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큰 소리도 나오지 않은가 보다. 장기는 동(動)적이고 바둑은 정(靜)적인 두뇌게임인 것 같다.
한때는 이 나라의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기여를 하고 한편 가족을 위해서 온 힘을 다해서 격동기를 살아온 아버지요 가장이기도 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현장을 떠나게 되고 제도권에서 밀려나면서 갈 곳도 없이 시간을 보낼 곳도 없이 대문을 나서는 이 시대의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백세시대라고 하는데 점점 많아지는 노인인구를 위한 정부의 대책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그리 만족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이곳에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노인들은 행복한 것 같다. 본인의 취미를 살려서 즐기면서 인간관계를 이어가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게 되고 대체로 경제적으로도 비교적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지금 사용하고 있는 두 개의 정자는 지은 지가 꽤나 오래 되어서 많이 낡았고 언젠가는 내려앉은 마루를 장기 두러 온 한분이 수리하는 것을 본적도 있다. 고칠 곳이 있으면 자체적으로 다 해결을 하는 것이다. 비가 오면 정자 안으로 빗물이 들어와서 바둑판 장기판이 다 젖는 것은 물론이고 난방이나 전기시설도 안 되어 있어서 이제 곧 찬바람이 불고 추워지면 어떻게 될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
현재 수인선 전철 복선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데 지금 이장소가 전철역사가 들어서기로 계획이 잡혀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노인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정들었던 명소가 사라질 수밖에 없어서 걱정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행정당국에서 결정을 잘해서 노인들의 쉴 수 있는 새로운 장소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기왕이면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어서 사계절 내내 편안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바둑과 장기만이 아니라 다른 취미생활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유익한 장소가 만들어 지기를 빌어본다.
가을이 점점 깊어가고 있다. 시월의 햇살은 따사롭고 황토 십리 길의 모습은 평화롭기만 하다. 그리고 이곳의 정자나무도 조금씩 단풍이 들고 있다. 그 아래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들과 바둑판과 장기판에서 고도의 정신 스포츠게임을 즐기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오늘도 여전한데 이 아름다운 풍경을 오랫동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