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로 달이 바뀌자마자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가을 비 치고는 제법 많은 양이 쏟아지는데 올 가을 들어서는 비가 잦은 것 같다. 가는 가을이 아쉬워서인가, 겨울을 재촉하는 듯 온 대지를 촉촉히 적시고 있다.
최헌이라는 가수가 불러서 많은 인기를 끌었던 `가을비 우산 속이라는 노래를 나는 좋아 하는데 허스키한 목소리로 호소력 있게 가슴을 적셔주던 이 가수는 아깝게도 얼마 전 타계했
다. 가을비가 오면 이 노래를 혼자서 잘 흥얼거리는 편인데 왠지 오늘은 부르고 싶지가 않다.
구월과 시월을 소재로 한 노래는 참 많은 편인데 11월의 노래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용이라는 가수가 부른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를 많이 들을 수 있었고 시월 마지막 날은 하루종일 방송을 탔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이렇게 가사가 시작되는 이 노래는 나온 지 30년이나 되었는데도 시월달만 되면 가수
이용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한다.
그리고 성악가 김동규가 불러서 많이 알려지고 결혼식 축하곡으로도 인기가 있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노래도 있다. 나의 애창곡이기도 한 이 두곡은 시월 달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도 없이 들었던 노래이다. 그 외에도 가을을 주제로 한 노래는 셀 수 없이 많다.
가을이 우리 곁에 찾아온 것이 언제인가? 푸르던 잎이 빨갛고 노랗게 물드는가 싶더니 어느 새 집 앞 놀이터엔 낙엽이 수북이 쌓이고 스산한 바람에 사방으로 흩날리는데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나뭇가지는 점점 더 앙상해 질 것이다. 이제 가을이 우리 곁을 떠나려고 인사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라디오 뉴스에서 기상캐스터가 오늘은 옷을 따뜻하게 챙겨 입고 나가라는 멘트를 하고 있다. 어느 해인가 아무 준비 없이 외출했다가 추위에 엄청 고생한 적이 있어서 이맘때면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아직도 여름옷을 입는 사람들도 있기도 한데 나는 겨울옷을 꺼내는 것은 물론 내의까지 챙겨 입기도 한다. 첫 추위에 떨고 나면 그해 겨울 내내 힘들었던 경험 때문이다. 한번은 아는 화가의 전시회에 갔다가 때마침 오늘같이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다 뒷풀이 장소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되어 배탈이 나서 추위와 함께 고통에 시달리며 집까지 오는 동안 힘들었던 적도 있다.
마침 벽에 걸린 달력을 보다 새삼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든다. 세월은 왜 이리 빠르기만 한지, 어느새 11월이 되었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연말이 가까워 지면은 왠지 마음이 바빠지는 것 같고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무얼 하고 살았는지 후회가 밀려오고 우울해 지는게 요즘의 나의 모습인데 아마 대부분의 가을을 타는 남성들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싶다.
산을 오를 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 올라서면 그 짜릿한 성취감에 잠시 기뻐하다가 아쉽지만 다시 내려가야 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삶의 현장에서 힘들게 올라갔으니 그곳에서 내려오기 싫어서 망설이면서 머뭇거리기도 하고 더 높이 오르려다 실족하기도 한다. 되돌아보면 오르기 위해 위만 쳐다보며 걸어온 나 자신의 어리석은 발자취를 발견하게 된다.
어느 선배가 고향에 미술관을 짓고 정착하여 말년을 보람되게 보내는 모습을 보고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하고 싶은 바램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다 인연이 있는 모대학에 기증을 하기로 하고 그림을 정리하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하나도 없어서 나는 가슴을 쳐야만 했다.
평생을 환쟁이로 살면서 변변한 작품하나 보여줄게 없으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떤 선배는 수천 점의 그림을 보관 중이라고 자랑을 하는데 나는 작품수조차도 그리 많지 않아서 한 번 더 충격을 받았다.
이제부터는 다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화선지를 채워 나가야지,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작품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붓을 들지 못하고 있다.
무얼하며 살았는가? 이제 어떻게 살려는가? 나에게 이 화두는 그릴 것인가 안 그릴 것인가의 문제이다. 창밖을 내다보니 비 오는 길 위로 강아지 한마리가 재빠르게 지나간다.
살면서 수많은 고개를 넘어왔다. 어쩌면 마지막 고개일 수도 있는 힘든 고개 앞에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현재의 나 자신에게 지혜롭게 이 고개를 잘 넘어 가기를 빌어본다.
나는 우산을 쓰고 비에 젖은 집 앞 황토십리길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비바람에 잎이 많이 떨어져서 뒹굴고 있는 것을 보니 가슴 한편이 저려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가지에서 푸른빛을 자랑하였는데 지금은 땅에 떨어져 오가는 이들의 발길에 채이며 밟히고 있으니 안타깝지만 이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얼마 전 어느 지인의 소개로 S화재보험에서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보험에는 크게 생명보험과 손해보험으로 나눠지며 그 사이에 제3보험이 있다고 한다. 생명보험은 생명을 다루는 인(人)보험이라 하고 손해보험은 물(物)보험이라고 해서 재산이나 물질적인 손해를 보상하는데 제3보험은 두 보험의 상품을 일부를 판매할 수가 있으며 두 상품이 겹치는 부분을 `그레이존(회색지대)이라고 한다.
가을의 끝자락에 있는 11월은 겨울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회색지대 계절의 `그레이존에 해당하지 않을까?
또 지금의 내 모습이야말로 전반기와 후반기가 겹치는 인생 그레이존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든다.
보험이란 위험에 대비해서 미래를 위해 자기 인생을 설계하고 보장을 받는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인데 나 자신도 마찬가지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관심하다. 그러다 불행이 닥쳤을 때 비로소 보험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인생도 처음부터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나중에 결과가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잘못 산 삶이었음을 느끼게 되고 후회할 때는 이미 늦어 버리는 게 인생이다.
계절의 경계선인 11월에 내 인생의 경계선이 함께 겹치는 이 `그레이존을 슬기롭게 탈출하여야 겠다. 그래서 불확실한 회색지대 그레이존이 아닌 `그린존으로 바꾸는 새로운 삶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최헌의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히인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