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임진왜란의 피로 쓴 징비록이 서서히 시청자들과 서점가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전시 총사령관직인 영의정 및 도체찰사였던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7년을 온몸으로 겪은 후 집필한 전란의 기록이다. 국정 최고의 요직에 있으면서 전란의 현장에서 백척간두의 조선을 이끌었던 류성룡이었기에 누구보다 전란의 참혹함과 그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후세에 전하고자 피눈물로 쓴 전란사가 징비록이다.
역사는 과거의 정치이고 정치는 현재의 역사다. 동서붕당으로 인한 조선통신사의 내부분열, 파천(播遷: 임금이 수도를 버림)을 둘러싼 대립, 몽진(蒙塵: 임금의 피난)하는 왕조에 대한 백성의 적대감, 조선군의 무능함, 그리고 대안을 둘러싼 조정의 갈등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고민과 이슈를 환기 시킬 것이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일본에선 일찍이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유입된 징비록이 1695년에 국책사업의 성격으로 출간하고 연구되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상당부분 낯이 익다. 불과 60여년 전인 1950년 6.25전쟁에서도 온 국토가 외세의 힘이 부딪치고 전쟁터가 되면서 수많은 국민이 희생되었다. 가장 일치되는 광경은 지도자의 행태이다. 조선의 한양과 대한민국의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기만한 다음 백성을 버리고 도주한 그들, 제 위치를 지키라고 방송한 다음 어린 학생을 버리고 빠져나간 세월호 선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심지어 남은 백성은 어떻게 되든 적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선조는 배를 파괴하고 이승만은 다리를 폭파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에도 각성하지 못한 채 당파싸움만 하다 징비록을 완성한 지 불과 32년 만에 조선은 병자호란의 국치를 당한다. 게다가 이미 9년 전인 1627년에 정묘호란을 당하는 등 충분히 경고를 받았으면서도 대비 못한 조선은 류성룡이 징비록을 저술한 의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1953년 휴전이 된 이후 한국의 역사도 위기감을 함께 느낀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왜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 이후 교훈을 제대로 받아 들었는지 부검하고자 했다.
또한 중국이 G2로 등극해 미국과 자웅을 겨룰 이 시대에 사드 배치 문제와 AIIB 가입 등
중대한 외교 안보에 징비록을 다시 펴 본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고 전쟁이 끝난 시점에 류성룡의 능력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그래서 선조의 의중을 간파한 반대파의 중상모략과 탄핵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결국 삭탈관직을 당하고 낙향했다. 또한 이순신과 류성룡이 왜 탄핵을 당해야 했는지 전란 당시 임금과 신료들은 무엇을 했고 백성들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중국 명나라는 과연 우리의 우군이었는지 일본에 침입에 대한 준비 등, 임진왜란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파헤친다.
2014년 4월 16일은 지워지지 않을 우리 몸의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세월호 선장은 어린 학생들과 젊은 교사들에게 제자리 지키라는 안내방송만 남긴 채 세월호를 떠났다.
그러나 예전에 600명의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태우고 남아프리카를 항해하던 버킨헤드호가 좌초되어 침몰하는 사건이 있었다. 군함 안에는 한 대당 60명을 태울 수 있는 구명정이 3대가 있었다. 군함의 선장인 셀튼 선장은 군인들에게 자신들의 가족을 먼저 구조하라고 지시하여 어린이, 여자, 그리고 늙으신 분들 순서로 180명은 구조되고, 나머지 420명 군인은 배와 함께 침몰하였다. 이렇게 해서 배가 항상 침몰할 때는 어린이 먼저, 그 다음 여자, 그 다음 늙으신 분들 먼저 구조하는 전통이 생겨났다.
1912년 4월 2,200명을 태우고 영국에서 뉴욕으로 항해하던 도중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타이타닉호 선장은 배를 버리고 떠나는 무책임한 선장이 아니라, 승객 중 어린이, 여자 순으로 탈출시키고 마지막에 침몰하는 배와 같이 최후를 함께한 타이타닉호의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은 침몰하는 배와 운명을 같이한 직업의식과 책임감을 보였던 전 세계인의 우상으로 그 영화의 명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우리 역사에서 결코 반복해서는 안 되는 비극이 오늘도 계속해서 되풀이 되고 있다. 가까이는 1993년도 서해 훼리호가 침몰해 292명의 귀한 생명을 잃었고, 이 아픔이 아물기도 전에 2003년 성수대교가 붕괴되었고, 그 다음 해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500여명이 사망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2003년에는 대구에서 지하철이 불타 190여명의 희생자가 생기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렇게 반복되는 사고는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었으나 안일과 무능함과 그리고 안전에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위기를 겪으면 그 경험을 토대로 반성하고 한 단계 성숙해야 하는 데도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위기는 그저 위기일 뿐 반복되고 있다." 일찍이 비극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서 경계하고 반성하며 해법까지 제시하고자 집필된 것이 징비록이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우리 후손들의 한국은 1590년대 조선과 달라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까닭은 과거를 뒤돌아 보고 어지러운 발자국을 확인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