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작 1년에 한 번, 2년에 한 번 고향을 방문한다. 젊을 때는 내가 하는 강의와 연구에 올인하느라고 그랬고, 나이가 들어서는 기운이 달려서 자주 못 간다. 그래서 누구는 그랬던가, 자주 못 가는 곳이 고향이라고.
모처럼 내가 고향을 찾아가도 아는 사람이라곤 막내 동생과 김수호 전 조합장 그리고 몇 사람의 동기생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고향을 떠난 지 어언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그곳에서 학교를 다닐 때 살아계셨던 어르신들은 물론 그때 활동하시던 아저씨들마저도 모두 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때 엄마 품에 안겨서 똥오줌도 가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른이 되어 그곳에 살고 있으나 나를 알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살던 동네의 모습도 상당히 많이 바뀐 요즈음, 나와 함께 고향에서 자란 친구들은 거의 다 대구로, 서울로 출향을 하고 말았으니 이제 고향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설령 이런 현상이 자연스러운 변화일지라도 고향에 가서 내가 이렇게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조금은 구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일런가 하노라"라는 옛시조가 지금 나의 심정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다.
고향에 있는 동기생들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10여 명 살아 있었는데 요즈음 들리는 얘기로는 그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2012년 8월 15일 동기생들이 모이기로 한 날에 모교의 그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는 달랑 최기수 동기생 한 사람만 나타났다. 모두 몸을 움직일 수 없거나 세상을 뜨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런 소식을 들은 후 고향을 찾아간 나는 정녕 `나그네` 같은 쓸쓸함을 느껴야 했다. 더욱이 불귀의 객이 된 더 많은 친구들을 다시 만나 볼 수도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돈다. 인생의 무상을 한껏 느낄 뿐이다.
정들면 타향도 고향이라고 했던가? 이제 나는 고향에서는 나그네 같고, 타향이 오히려 고향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 타향에는 이웃 사촌들이 몇 사람 있으니 친척은 아닐지라도 남은 여생 동안 정을 주고받으며 살아야겠다.
어떤 고향 친구들은 죽고 난 다음 소위 고향에 있는 선산으로 가서 묻히기를 원한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요새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고향 사람들도 드물다. 말하자면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환고향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저 이 부근에, 자손들이 쉽게 찾아 올 수 있는 공원묘지나 납골당에 가고 말겠다는 것이다. 더 막가는 사람들은 자기가 죽으면 화장해서 적당한 나무 밑이나 물가에 가서 뿌리고 흔적조차 남기지 말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에게는 고향도, 타향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