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가 언제까지 친일을 두고 논쟁을 벌일 것인가? 바로 말해, 어떻게 했거나 친일은 친일이고 반일은 반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대국적인 견지에서는 구분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른바 고관대작들이 세(勢) 불리함을 알고 을사오적이 되었고 회유와 겁박에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다가 급기야는 작위까지 받고 기회주의적 일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을 팔아먹은 이들이야말로 친일 매국노들이다.  지식인이라고 별로 다르지 않았다. 민족 대표 33인 중에도 단말마 같은 일제의 폭압 앞에 변절하여 친일의 낙인이 찍히기도 했고, 지금 들어도 민족의 독립이 절체절명, 얼마나 절절했는가를 알 수 있는 독립선언서를 초안한 인사도 친일을 했다. 간악한 일제가 조선사편수위원회를 만들어 우리 역사를 조작·왜곡하려 할 때 그걸 막으려 참여했던 것이 결과는 친일이 되고 만 것이다.  정부수립 이후 부처 요직에 있었던 친일했던 인사들을 색출하기 위해 반민특위가 설치되어 활동했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것도 근현대사의 관점에서 보면 과오라면 큰 과오였다.  6·25도 겪고 나라의 기틀이 좀 잡힌 후에 여기저기서 친일 문제가 다시 불거져 이슈화가 되었다. 대학총장까지 지낸 어느 인사는, `나도 사실은 친일을 했다. 이제라도 실토하여 국민들의 용서를 받겠다`고 지상에 공개 사과문을 싣기도 했다. 또 우리 시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어느 시인은 생전에 자기 친일 행적을 두고 `그 하늘(일제)이 이 하늘(대한민국)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고 탄식을 섞어 고해성사를 한 일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평판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통절한 고백임에는 틀림없다.  미쳐 날뛰는 악명 높은 왜경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 왜놈 순사들은 꼭 앞잡이(끄나풀)를 달고 있었다. 끄나풀이 된 그들도 자의도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냥개(?)가 되었던 쓰라린 역사도 있다.  최후의 발악을 하던 그들은 부녀자들에게 몸빼 바지를 입게 했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전차 승차도 못하게 하고 관공서 출입도 막았다. 장날엔 간단한 일본말도 못하면 막아서서 할 때까지 붙들어 놨던 적도 있었다.  전쟁 막바지로 치닫던 말기에는 놋그릇 공출도 해야 했다. 앞잡이, 몸빼, 놋그릇 공출도 따지고 보면 친일이다. 그러나 작위 받고 호사를 누려 민족을 배반한 친일과는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 교육부가 `이달(3월)의 스승`으로 백농 최규동(白儂 崔奎東 1881-1950) 선생을 선정했다. 이를 두고 ㅇㅇ실천연대가 친일 행적이 드러났다고 딴죽을 걸었다. `진영논리`로 가득한 허울 좋은 역사정의? ㅇㅇ실천연대? 익히 들어본 이름이다.  일생을 오로지 민족교육에만 헌신하신 선생이 친일을 했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앞서 말한 작위 받은 친일과 놋그릇 공출한 친일은 구분해야 한다고 했듯, 친일 글을 쓰지 않으면 학교를 폐쇄하겠다는 폭압에 어쩔 수 없어 써 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민족교육에 투철하고 소신이 강고(强固)한 선생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평양서 도산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은 것은 그만두고라도 중동 제자(안호상·양주동)들의 증언으로도 민족긍지, 민족교육의 열정이 어땠는지를 알게 하고도 남는데 친일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다. 혹여, 폐교 압박에 일시적 소나기는 피하자는 심정은 아니었을까?  수년 전 친일인명사전이 발행되어 한바탕 회오리가 일었다. 몇몇 인사는 그 진위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일도 있다. 전직 대통령 한 분이 일본 육사 나온 것만으로도 `친일`이라는 잣대를 들이 댄 그들이 백농 선생을 빠뜨릴 일은 분명 아닌데 그 사전에도 없는 선생을 느닷없이 지금에 와서 친일이라니 솔직히 말해 믿음이 가지 않는다. 더구나 `관변잡지`라니 그야말로 대필이거나 위필(僞筆)은 아닐까라는 가정도 하게 된다. 최후 발악 단말마의 일제가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무슨 곡절이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은 물론 선생이 세운 중동학교 교장 시절에 훈시도 우리말로 했으며, 그것도 감시자가 들을까봐 작은 소리로 했다고 그 제자들은 한 목소리로 증언한다. 일경이 찾아 와서 창씨개명을 하라 하면 `나는 이미 최씨`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버티어 낸 이런 분을 친일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白儂 이라는 아호만 봐도 선생이 얼마나 민족교육에 온 열정을 쏟은 것을 알게 하고도 남는다. 白은 백의민족을 뜻하고 儂은 사람의 농사이니 그게 바로 민족교육이요 입교구국(立敎救國)이라는 말이었다. 일화도 많이 남겼다. 8세에 석류나무를 보고 한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10세에 사서삼경을 줄줄 외니 온 성주 고을에 신동이 났다고 명성이 자자했다 한다. 또 수학 대수(代數)를 통달해서 `최대수`라는 별칭을 얻어 `한국의 수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한다.  1949년 제3대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었으며 비극의 6·25 침략자는 선생을 납북해갔다. 민족교육의 표상이자 선구자요, 한말 풍전등화의 시기에 교육입국의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애국자 백농 최규동 선생은 평양 감옥에서 그렇게 산화해 가고 말았다.
최종편집:2025-07-15 오전 09:3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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