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막 시작하는가 싶더니 밤새 첫눈이 내렸다. 그런데 첫눈치고는 너무 많이 와서 기상청에서 대설주의보를 발표할 정도로 낮 동안도 눈이 그치지 않는 바람에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해버렸다.  천안의 S대학교 교정의 눈오는 풍경은 너무 아름다워서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그야말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석조건축물로는 문민정부 초기에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철거된 옛 중앙청 건물보다 더 크다는 본관건물을 중심으로 부속건물인 학생회관, 조경수로 심어놓은 각종 나무들 위에 그야말로 그림같이 쌓인 눈이 나의 눈을 부시게 한다.  설경작가로 알려질 만큼 작품소재로 설경을 즐겨 그리는 나로서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기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정신없이 한참을 운동장을 누비고 다녀야했다. 온갖 거짓과 사악함이 판치는 이 사바세계를 눈처럼 하얀 깨끗한 세상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을을 소재로 한 노래 소리를 들으며 지는 낙엽을 안타까워하였는데 어느새 겨울의 초입에서 갑자기 펼쳐진 백설의 향연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마음은 어느새 동화속의 주인공이 되어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간 듯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금방 취하고 말았다.  봄에 꽃을 피워 여름에 절정을 이루고 가을에 열매 맺어 겨울을 맞는 자연의 섭리는 우주 질서 속에서 변함없건만 사람들 마음은 한결같지 않나 보다.  나이가 들면서 세월이 유난히도 빠르게 느껴지는데 한 장밖에 남지 않은 달력을 마주하면서 분주히 살아가는 이웃들을 바라보며 공연히 조급해 지는 건 나만의 기우일까?  이 눈 내리는 겨울을 나는 몇 번이나 맞이하였는지, 되돌아보면 삶 자체가 굽이굽이 높고 낮은 고갯길이었다.  고개의 사전적 의미는 흔히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사람이나 동물의 목 위의 부분이고 둘째는 산이나 언덕을 넘어 다니도록 길이 나있는 비탈진 곳, 셋째는 10세 단위로 쌓이는 나이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어떤 고비나 절정을 이루는 부분이라고 할까, 고개란 그 지역 산지 중 가장 높은 곳을 통과하는 관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영(嶺) 현(峴) 재, 치 티,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동수단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타 지역을 갈 때 넘기 쉬운 고개를 택했다. 단거리가 되기 때문에 고개는 교통의 요지로써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개는 만남의 장소였고 이웃마을로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와 만나서 시집살이의 설움을 털어놓으며 회포를 푸는 장소이기도 했고 보부상들이 장을 보러 다니며 바쁘게 넘던 길이기도 했다. 지금같이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는 소식을 주고받는 민의의 전당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연과 애환이 담겨있고 길손들의 정겨움이 묻어있는 그 옛날 고개이야기는 아무리 쏟아내도 한도 끝도 없지 싶다.  신의섭리와 역사의전개도 고개의 노정(路頂)이 아니었을까? 수 천 년 이어진 인류역사 속에서 얼마나 큰 고비들이 많았던가? 그 과정 과정마다 수많은 역경이 서려있고 투쟁과 평화, 흥망성쇠를 반복하면서 역사는 발전해 온 것이다. 신은 역사의 배후에서 선지자와 중심인물들을 보내어 인간세상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복귀섭리 역사를 펼쳐 나온 것이다  나는 경상도 한 산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주변의 많은 고개들을 보았고 수 없이 고개를 넘나들며 자랐다. 마을 전면에는 멀리 가야산이 바라보이고 뒤로는 매미재가 있고 동쪽으로는 벽진 장으로 가는 고갯길, 서쪽으로는 살티재로 넘어가는 산길이 굽이굽이 펼쳐진 하늘밑 첫 동네였다. 십리나 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작은 고개를 넘어야했으며 장에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는 곳도 그 고갯마루였다.  고향 마을에 눈이 오면 온천지가 하얀 세상이 되고 우리는 눈사람을 크게 만들고 동무들과 밤늦도록 뛰어놀던 그 시절이 아련히 생각난다.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에 고개 저 너머 미지의 세계 크고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운명의 끈에 이끌려 그토록 바라던 넓은 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곳에는 더 높고 험한 고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파르고 험한 돌짝길을 헤매이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넘을 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고향의 그 고개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그리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 마다 으레 그 고개를 생각했고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그토록 꿈꾸던 환쟁이가 되어 1999년11월초, 인사 동 공평아트센터에서 `천년의 고개를 넘으며라는 타이틀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내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나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과 지난날을 회고하는 의미가 크고 한국의 민속신앙에 나오는 마흔아홉 수는 20세기를 종언하는 세모에 깨끗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뜻에서의 절규이기도 했다.  그뒤 열 번도 넘는 개인전을 할 때마다 주제는 고개였고 타이틀은 `내 마음의 고개였다.  설경작품을 즐겨하는 나는 오늘같이 눈이 오는 날은 좋은 소재를 찾기 위해 발품을 팔면서도 고향의 그 고개를 그리워하며 어릴 적 그토록 벗어나고자했던 그곳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고개위에서 내려다본 면소재지 가는 길이 아슴푸레 떠오른다.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길을 돌아 울면서 고향을 떠나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덧없이 흘러 이제는 삶을 되돌아보는 나이가 되었다.누군가 길은 떠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난 후부터 먼 길을 떠돌던 인생길, 언제쯤 방황을 끝내고 고향 고갯마루로 달려 가볼까, 내마음의 고개를 그리며 백옥같이 하얀 눈이 소복히 쌓인 교정에서 온갖 허물로 덕지덕지 때묻은 내 영혼이 깨끗이 정화되는 듯 마음이 포근해진다.
최종편집:2024-05-17 오후 04: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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