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법산 얘길 두어 번 연재했지만 그야말로 주마간산이었고 간만 보고 만 형국이라 내용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예를 들어 시비치는 `峙` 어쩌고저쩌고 했는데 웬 비치(Beach·바다)였을까? 오늘의 외래어 홍수를 우리 법산이 선견지명으로 일찌감치, `롱비치·마이애미비치`라 하듯 `시비치(Sea Beach)`라 했던 것은 아닐까? 또 선창모퉁이를 구어체의 선착(船着)은 아닐까라는 궁색한 풀이도 했었는데, 바다나 강가에 배가 닿는 곳을 선창이라 한다는 것은 상식인데 왜 선착이라 했을까? 군대개울은 무슨 군대의 주둔지라도 됐었단 말인가? 그런데, 지금은 주위가 모두 경지인데 웬 강가였을까도 하겠지만 그건 100여 호 일성대촌이 형성되기 전에 죽헌 선조께서 복지를 정하실 때 여동, 성촌, 성법산 등의 지명이 있었던 걸로 보아 몇 집 단위의 뜸이 있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서 들머리 뜸에 있는 동네 입구에 냇물이 흘렀으니 선창이라 했을 것이다. 오늘의 이 인류문명이 형성되기 이전엔 토지 이용률이 턱없이 낮았을 것이다. 전회에서 일제시대에 새방천을 쌓았고 그 안이 웃버들과 아랫버들로 나뉘었다고 했듯 방천 축조 이전엔 아마도 산기슭에나 논이 좀 있었고 홍수가 나면 유실도 있었을 것이었다. 윗아랫 버들논 합친 면적과, 축조하고 남은 아무렇게나 내버려진 자갈모래땅의 면적이 비슷했음으로 보아 오늘날의 토지이용률과는 천양지차가 있다는 말이다. 새방천 축조 이후 방천 안이지만 그 버려진 자갈모래 사이사이로 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나왔고 그 물이 내를 이뤘는데 그걸 참나들이라 했으며 그 끝이 우리 논 주막뒤가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그 참나들엔 한 길이나 빠지는 습지가 있었으니 잉어·메기의 자연양어장이었고 겨울이면 시갯또(썰매) 타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오염`이라는 말도 없을 때 면경 같은 얼음장은 수초가 선명히 보이고 그 수초 사이로 잉어·메기가 자연스레 노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당시로는 별 신기하지도 않은 그냥 일상사였다. 그랬던 참나들이 오늘에는 옥토가 됐으니 그게 바로 상전벽해가 아닐까 한다. 6·25 이후 잘 살아보자는 국가정책에 따라 농지개발에 눈을 뜨기 시작하니 그 참나들이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용출하는 분수에 자갈모래로 그 아름다운 수초를 생매장시키고, 자갈밭에는 복토를 하여 농지화 하려고 당시로는 유일한 인력인 지게부대가 동원되어 산기슭 둔덕 흙을 져 날랐다. 나도 거기 참여하여 일당 500원을 받았다. 당시 사상계 값이 500원이었으니 이런저런 연유로 평생 각인이 돼 있다. 공사장(?)이 두어 군데 있었는데 나는 고인이 된 인수(麟洙) 씨 작업장에 투입이 됐던 것이다. 우리 법산이 그렇게 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 역사를 아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도 궁금한 반면, 일제 때 새방천 공사를 직접 체험했거나 아는 분은 어디 안 계실까가 더 궁금하다. 그런 분이 가까이 계시면 이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자문을 구할 것인데 그게 못내 유감스럽다. 민족의 대명절 설이 막 지났다. 우리 민족의 설의 의미는 각별하다. 한 해를 새로 시작한다고 하여 세수(歲首)라고도 하고 시제를 지내고 그 해의 운수를 비는 덕담을 나누며 새아침을 맞는다. 친인척은 물론 온 동네가 주고받는 설 인사인 세배야말로 농경사회의 참모습이었다. 더구나 우리 법산은 특수한 씨족사회이니 더 말할 것이 없다. 전통의 농경사회! 농사에 파묻혀 족친간이 다소 소원할 수도 있었고 때로는 논밭 이웃끼리 반목도 있었지만 새해 세배 인사 한 번으로 다 해소하는 따뜻한 족친애를 맛보기도 했다. 좀 심히 다툴 땐, `농사 다 짓기 전엔 항렬 찾지 말자`는 진 반 농 반도 있었던 우리 법산 특유의 족친 풍정이었다. 족친들은 그 위계질서만은 엄격했던 게 사실이다. 곧 이어지는 대보름의 달맞이행사. 농악 울리고 마당밟기와 지신(地神)밟기 행사는 샤머니즘이 아니라 우리 전래의 기복신앙의 발로였다. 열나흗날 밤중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도 지낸다. 그 제주(祭主)는 다사다난한 인생사에서 흠결이 없는 사람이 맡는다. 흠결이 없다는 것은 도덕적 흠결이 아니라 내외와 자식 구존(俱存)하고 가정사 흉사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부정한 일을 보지 않아야 하고 목욕재개하고 하루만은 근신하여 산신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제를 올린 제수(돼지머리)는 제단 밑에 파묻는 것이 관례였다. 장난꾸러기 악동(惡童)(?)들이 그거 캐먹으러 간다는 소리는 듣기는 했어도 먹었다는 소리는 듣질 못했다. 달맞이 행사.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堂山)에서 달불집 태우는 행사로 정월 대보름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달불놀이이다. 동녘이 벌개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뚫어져라 하늘만 쳐다보다 달 모양에 가까운 구름덩이만 보고도 한 사람이 `달봐라···!!` 하면 누구 하나 확인할 겨를도 없이 `달봐라!!`의 코러스(합창곡)가 나온다. 그냥 남을 따라만 해도 달은 언젠가는 뜨고 말 테이니 보고 못 보고를 따질 일이 아니었다. 그럭저럭 달은 떴고 달을 가리키며 위대한 발견(?)이나 한 듯이 한참을 소리만 지르는 사람도 있고 합장하고 기도하는 사람, 절만 해대는 사람 각양각색이다. 나의 법산! 또 언제 이런 정겨운 풍정을 보게 될까? 산업화도 좋고 ICT 시대가 초음속으로 발달해가도 다 좋지만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으로만 만족해야 하다니 참 허전하다. 오늘에 와서 또 그런 세시풍속을 다시 보기는커녕 더욱 멀어질 것을 생각하니 가슴만 헛헛해 온다.
최종편집:2024-05-21 오전 10: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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