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남동쪽 성주땅에 위치한 고찰 심원사와 법수사는 임진왜란때 화재로 인해 소멸됐으며 지난 2003년에는 심원사가 복원됐다.
심원사는 가야산 해발 700여m 지점에 위치한 고찰로 성주읍지에 의하면 고려말 이인임의 사돈 도길부가 나오며 도길부는 우왕6년(1380) 운봉황산대첩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등장한다.
도길부는 최영·조민수 등과 함께 패망에 이른 고려에 충성을 다함으로써 이성계의 미움을 사게 됐으며 이에 고향인 성주로 도망을 쳤고 가야산 심원사로 숨어들었다.
도길부를 쫓아온 관군이 심원사에 이르자 심원사 주지스님이 크게 꾸짖어 이르기를 "죄지은 자가 있든 없든 부처님의 땅에 침입해서는 안된다"라며 막았고 이에 관군이 물러갔다.
심원사에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의 유학자인 이승인(1347-1392년) 도은집에 `심원사에 부치다`라고 하는 시가 있다.
가야산에 있는 고찰 심원사
송백의 그늘 속에 빗장 걸지 않아
농엄경의 깊은 뜻으로 두드리노니
이몸의 한가함을 얻을 수 있으려나
위의 시를 통해 심원사가 고려말에 이미 고찰로 인식됐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기록으로는 정구(1543-1620년)가 선조12년(1579년) 9월에 가야산을 유람할 때 심원사를 지나가면서 거의 허물어진 고찰 심원사를 지났는데 옛날에 여럿 잠을 잤던 곳이라 감회가 새로웠다고 쓴 유람기가 전해진다.
현재 심원사지 자리에는 2003년 재건된 심원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탑재들을 복원해 대웅전하단의 종정으로 옮겼다.
법수사는 신라 제40대 예장왕3년(802년)에 창건해 원래는 금당사라고 이름이 붙여졌으나 후대에 법수사로 개명했다고 한다.
법수사와 관련해 삼국유사 권2기 이편 김부대왕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신라 제56대 경순왕(935년)이 신하들과의 논한 후 고려태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했다. 이에 신라의 태자는 개골산으로 들어가 풀을 먹다가 세상을 마쳐 마의 태자로 불렸으며 막내아들은 승려가 됐다고 한다.
범공이라는 이름을 받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는 가야산 법수사와해인사에 거처했다고 전한다. 즉, 법수사는 경순왕의 막내아들 범공이 머물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법수사의 부속사찰인 용기사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승장신열이 승병들을 동원해 화포를 교습하고 전쟁을 치른 기록이 남아있다.
따라서 이 절터는 수백명의 승군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추정되며 이곳에 머물며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와 돌로 만든 맷돌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성주읍지에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천년이 넘는 용기사는 가야산 중에 있고 가뭄 때 이곳에 기우제를 올리면 자못 효혐이 있어 뜻을 이룬다고 한다.
절터 앞 봉두에 한 쌍의 돌이 마주하고 있는데 이를 칭해 용의귀라고 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시고 있는 바로자나불은 원래 법수사에 안치돼 있던 것이 용기사로 옮겨졌다가 다시 해인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1897년 용기사가 폐사됨에 따라 해인사의 주지였던 법운스님이 바로자나불을 해인사로 모셨는데 이 또한 재미있는 민담이 있다.
용기사에서 고개를 넘어 바로자나불상을 옮겨 모시던 중 갑자기 불상이 땅에 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놀란 법운스님이 직접 버선발로 황급히 달려 나와 정성으로 예불을 올리자 불상이 다시 움직였다.
사람이면 누구나 고향이나 부모님 곁을 떠나면 마음이 아프듯 해인사로 옮겨지는 불상도 그런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명당자리를 떠나는 옛 성주사람들의 애잔한 마음이 녹아든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박삼태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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