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지류중의 하나인 대가천을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고령을 지나서 성주댐을 이십오리쯤 남겨두고 갖말(枝村)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청주정씨 집성촌이다. 이조 중엽 때 대사헌 관직을 지냈던 한강 정구 선생은 이 마을 정씨네 후손들의 중시조이기도 하지만 퇴계 이황 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는 대성리학자라는 것은 오늘날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한강 선생은 퇴계와 남명, 두 분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두 분 모두가 한강을 가장 아꼈을 만큼 두 분의 수제자였다. 한강이 만년에 벼슬을 그만 두고 풍치가 절경인 갖말에서 여생을 보낸 탓으로 갖말에는 지금도 선생을 위한 회연서원도 있고 선생이 남긴 문집도 많이 있다. 따라서 갖말의 정씨네들 뿐 아니라 성주 사람들은 대유학자인 한강 선생을 높이 흠모하고 있다. 마침 갖말에는 한강선생의 직손인 나의 이모부가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가끔 어머니를 따라서 그 마을에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내가 열일곱살이던 여름방학 때 이모댁엘 간 적이 있는데 그 때 그곳에는 초등학교 6학년생인 낯선 소녀가 하나 있었다. 그 소녀는 회원서원의 서원지기 하인의 질녀였다. 회원서원의 건물은 일반 문중의 제실 규모였고 그 서원지기 하인의 가족들은 회원서원의 행랑채에 살며 정씨네 문종 위토를 소작하면서 소작료를 주지 않는 대신 정씨문중의 궂은 일들을 해주며 지내고 있었다. 회연서원지기 하인의 질녀인 그 소녀의 이름은 달님이라고 했는데 달님은 어려서 부모를 읽고 서원지기 삼촌에게 얹혀서 외롭게 살고 있는 것을 나는 그날 알 수 있었다. 달님이를 잉태할 무렵 달님의 어머니가 꿈에 보름달을 보았다 해서 달님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지만 달님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탐스러워서 달님이라고 부를런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해보았다. 그날 내가 어머니와 같이 이모집 마당에 도착했더니 달님이가 날렵하게 달려와서 허리를 구십도로 굽히며 절을 하더니 어머니가 들고 있는 보따리를 잽싸게 받아들었다. 첫눈에 달처럼 아름답고 영리한 소녀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어머니가 나를 수도암 비로자나불부처님(보물 307호)께 치성을 드려서 낳았다는 것을 이모님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는 달님은 나에게 비로자나불 도련님이라며 최경례를 올리는 것이었다. 달님은 나에게 비로자나불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었다. 비로자나불은 지혜의 법신이며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 가변성을 띠며, 그 모습을 나타내고 누구든지 진심으로 기도하고 간절히 기구하면 알맞게 나투어 자비를 베푼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수도암 석조 비로자나불님께 기구했기 때문에 내가 태어났을거라고 했다. 나는 국민학교 6학년생인 달님의 총기에 탄복을 하며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전에 어머니가 이모집에 갔을 때 알려주더라고 했다. 달님은 언필칭 나에게 비로자나불 도련님이라고 불렀고 어머니에게는 큰마님이라 했다. 어머니가 이모님의 언니이기 때문에 큰마님이라고 했다. 나는 비로자나불 도련님이란 호칭이 듣기 싫다고 했더니 그러면 어떻게 불러야 하느냐고 달님이가 물었다. 나는 오빠라고 부르라했다. 달님은 크게 감동하면서도 하녀 신분으로 감히 오빠라고 부를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께 배운대로 인간은 누구나 법앞에는 평등하며 신으로부터 똑같은 인권을 부여받았다고 말했다. 이때 달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오빠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달님의 구슬 같은 까만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그 때 나는 달님의 오빠라는 그 소리가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었다. 이 고독하고 어린 영혼의 진실한 오빠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어느날 달님은 나를 갖말의 산야를 안내하더니 한강선생의 기념비며 유적들을 아는 대로 설명을 해 준 다음 한강이 지은 한시 세 편을 유창하게 읊어 주는게 아닌가. 그뿐 아니었다. 달님은 나에게 만년필과 종이를 달라더니 그가 조금 전에 읊었던 그 한시를 적어주는데 그 글씨조차 단정하고 예뻐서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나는 이런 것을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했더니 나의 이모부가 마을 청년들에게 한학을 가르칠 때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했다. 소소산전 소소가 (小小山前 小小家) 만원매국 수년가 (滿園梅鞠 遂年加) 갱교운수 장여화 (更敎雲水 粧如畵) 거세생애 아최사 (擧世生涯 我最奢) 낮은 산, 작은 초가 매화와 국화는 해마다 뜰에 가득 다시 구름과 물로써 그림같이 단장하니 세상에서 나의 생애 가장 사치해 가천어아 유심연(伽川於我 有深緣) 점득한강 우회연(占得寒岡 又檜淵) 백삭청천 종일완(白石淸川 終日翫) 세간하사 인단전(世間何事 人丹田) 가천은 나에게 인연 깊은 곳 한강(지명)과 회연이 있네 흰돌 맑은 시내를 종일 보고 있으면 세상 무엇이 나의 마음 흔들리 대장부심사(大仗夫 心事) 백일여청천(白日與 靑天) 뇌락인개견(磊落人 皆見) 광망정늠연(光芒正凜然) 대장부 마음은 밝은 해와 푸른 하늘 뇌락 같은 기상을 사람들은 보지만 빛은 끝 간 곳은 바르고 늠름하네. 달님은 위의 한시 세 편중에서 셋째편을 꼭 주목하라고 했다. 달님이가 비록 천한 하녀이고 여자지만 남녀평등의 민주주의 시대, 반드시 뇌락 같은 기상을 보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간곡하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꼭 세번째의 한시를 명심하고 늠연한 대장부의 목표를 달성하라는 거였다. 우리 둘은 그 길을 향해서 경쟁도 하자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신이던 매월당 김시습을 보는 것처럼 놀랐었다. 나도 그때 젊은이다운 호연지기가 발동하는 것을 느꼈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려워서 불가능했지만 이모집은 넉넉했기 때문에 이모부는 달님을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달님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달님이네 가족은 갖말을 떠나 버렸다. 그때 쯤은 서원지기 하던 사람들은 신분상승을 위해서 행선지를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떠나던 때였다. 풍문에 달님이네 가족은 서울로 갔을 거라고 하기도 하고 부산에 갔을 거라고 추측했지만 아무도 달님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고해성사 같지만 나는 오랫동안 성숙한 달님의 모습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내 인생 사양길에 접어든 지난 봄에 천만뜻밖에도 발신인 주소가 강원도 어느 사찰로 되어 있는 달님의 편지가 왔었다. 그리고 발신인 이름은 정늠연(正凜然)이가 아닌가. 나는 이튿날 그 사찰에 가서 달님을 만났었다. 꽤 아담한 사찰에 비구니만 40명인데 달님은 그 절의 수장이었다. 다시 고해성사하거니와 나는 거의 50년 동안 달님을 여색(女色)으로서 음심(淫心)으로 그녀를 그리워했었다. 그러나 강원도 그 사찰의 뜨락에서 나를 맞이한 달님의 달덩이 같은 그 얼굴에서는 색욕은 커녕 성스러움의 극치를 보았다. 육십이 넘어도 주름살 하나 없는 그의 달덩이 홍안에는 거룩한 해탈과 무아와 무욕의 불성의 빛이 타오르는 듯 했다. "오라버니 저는 만분의 일도 처음의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초지일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 한 것만큼은 뇌락 같은 기상이 있었음을 자부해요. 저는 한강도 진시황도 억만장자도 부럽지 않아요. 그리고 오라버니께 그때 제가 뇌락 같은 기상을 갖겠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길이었어요. 저는 그때 벌써 불제자가 될 것을 작심했거던요. 이렇게도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운 것은 세속에는 없을 거예요." 나는 그때 정늠연의 회색 법복자락을 잡고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고 말았다. 달님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속세의 더러운 때가 묻은 나로서는 너무도 부끄럽고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예순이 넘고 중이 된 그였지만 그래도 나는 산문입구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그를 색정심(色情心)의 대상으로 생각했던게 얼마나 죄스럽고 부끄러웠던지 이 순간도 나는 나의 혀를 깨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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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늠연(正凜然)


성주신문 기자 / sjnews5675@gmail.com 입력 : 2017/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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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 철 (사)국제문인협회 경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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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지류중의 하나인 대가천을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고령을 지나서 성주댐을 이십오리쯤 남겨두고 갖말(枝村)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청주정씨 집성촌이다.

이조 중엽 때 대사헌 관직을 지냈던 한강 정구 선생은 이 마을 정씨네 후손들의 중시조이기도 하지만 퇴계 이황 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는 대성리학자라는 것은 오늘날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한강 선생은 퇴계와 남명, 두 분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두 분 모두가 한강을 가장 아꼈을 만큼 두 분의 수제자였다. 한강이 만년에 벼슬을 그만 두고 풍치가 절경인 갖말에서 여생을 보낸 탓으로 갖말에는 지금도 선생을 위한 회연서원도 있고 선생이 남긴 문집도 많이 있다.

따라서 갖말의 정씨네들 뿐 아니라 성주 사람들은 대유학자인 한강 선생을 높이 흠모하고 있다. 마침 갖말에는 한강선생의 직손인 나의 이모부가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가끔 어머니를 따라서 그 마을에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내가 열일곱살이던 여름방학 때 이모댁엘 간 적이 있는데 그 때 그곳에는 초등학교 6학년생인 낯선 소녀가 하나 있었다. 그 소녀는 회원서원의 서원지기 하인의 질녀였다.

회원서원의 건물은 일반 문중의 제실 규모였고 그 서원지기 하인의 가족들은 회원서원의 행랑채에 살며 정씨네 문종 위토를 소작하면서 소작료를 주지 않는 대신 정씨문중의 궂은 일들을 해주며 지내고 있었다.

회연서원지기 하인의 질녀인 그 소녀의 이름은 달님이라고 했는데 달님은 어려서 부모를 읽고 서원지기 삼촌에게 얹혀서 외롭게 살고 있는 것을 나는 그날 알 수 있었다. 달님이를 잉태할 무렵 달님의 어머니가 꿈에 보름달을 보았다 해서 달님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지만 달님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탐스러워서 달님이라고 부를런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해보았다.

그날 내가 어머니와 같이 이모집 마당에 도착했더니 달님이가 날렵하게 달려와서 허리를 구십도로 굽히며 절을 하더니 어머니가 들고 있는 보따리를 잽싸게 받아들었다. 첫눈에 달처럼 아름답고 영리한 소녀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어머니가 나를 수도암 비로자나불부처님(보물 307호)께 치성을 드려서 낳았다는 것을 이모님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는 달님은 나에게 비로자나불 도련님이라며 최경례를 올리는 것이었다. 달님은 나에게 비로자나불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었다. 비로자나불은 지혜의 법신이며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 가변성을 띠며, 그 모습을 나타내고 누구든지 진심으로 기도하고 간절히 기구하면 알맞게 나투어 자비를 베푼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수도암 석조 비로자나불님께 기구했기 때문에 내가 태어났을거라고 했다. 나는 국민학교 6학년생인 달님의 총기에 탄복을 하며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전에 어머니가 이모집에 갔을 때 알려주더라고 했다. 달님은 언필칭 나에게 비로자나불 도련님이라고 불렀고 어머니에게는 큰마님이라 했다. 어머니가 이모님의 언니이기 때문에 큰마님이라고 했다.

나는 비로자나불 도련님이란 호칭이 듣기 싫다고 했더니 그러면 어떻게 불러야 하느냐고 달님이가 물었다. 나는 오빠라고 부르라했다. 달님은 크게 감동하면서도 하녀 신분으로 감히 오빠라고 부를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께 배운대로 인간은 누구나 법앞에는 평등하며 신으로부터 똑같은 인권을 부여받았다고 말했다. 이때 달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오빠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달님의 구슬 같은 까만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그 때 나는 달님의 오빠라는 그 소리가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었다. 이 고독하고 어린 영혼의 진실한 오빠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어느날 달님은 나를 갖말의 산야를 안내하더니 한강선생의 기념비며 유적들을 아는 대로 설명을 해 준 다음 한강이 지은 한시 세 편을 유창하게 읊어 주는게 아닌가. 그뿐 아니었다. 달님은 나에게 만년필과 종이를 달라더니 그가 조금 전에 읊었던 그 한시를 적어주는데 그 글씨조차 단정하고 예뻐서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나는 이런 것을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했더니 나의 이모부가 마을 청년들에게 한학을 가르칠 때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했다.

소소산전 소소가 (小小山前 小小家)
만원매국 수년가 (滿園梅鞠 遂年加)
갱교운수 장여화 (更敎雲水 粧如畵)
거세생애 아최사 (擧世生涯 我最奢)
낮은 산, 작은 초가
매화와 국화는 해마다 뜰에 가득
다시 구름과 물로써 그림같이 단장하니
세상에서 나의 생애 가장 사치해

가천어아 유심연(伽川於我 有深緣)
점득한강 우회연(占得寒岡 又檜淵)
백삭청천 종일완(白石淸川 終日翫)
세간하사 인단전(世間何事 人丹田)
가천은 나에게 인연 깊은 곳
한강(지명)과 회연이 있네
흰돌 맑은 시내를 종일 보고 있으면
세상 무엇이 나의 마음 흔들리

대장부심사(大仗夫 心事)
백일여청천(白日與 靑天)
뇌락인개견(磊落人 皆見)
광망정늠연(光芒正凜然)
대장부 마음은 밝은 해와 푸른 하늘
뇌락 같은 기상을 사람들은 보지만
빛은 끝 간 곳은 바르고 늠름하네.

달님은 위의 한시 세 편중에서 셋째편을 꼭 주목하라고 했다. 달님이가 비록 천한 하녀이고 여자지만 남녀평등의 민주주의 시대, 반드시 뇌락 같은 기상을 보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간곡하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꼭 세번째의 한시를 명심하고 늠연한 대장부의 목표를 달성하라는 거였다. 우리 둘은 그 길을 향해서 경쟁도 하자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신이던 매월당 김시습을 보는 것처럼 놀랐었다. 나도 그때 젊은이다운 호연지기가 발동하는 것을 느꼈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려워서 불가능했지만 이모집은 넉넉했기 때문에 이모부는 달님을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달님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달님이네 가족은 갖말을 떠나 버렸다.

그때 쯤은 서원지기 하던 사람들은 신분상승을 위해서 행선지를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떠나던 때였다. 풍문에 달님이네 가족은 서울로 갔을 거라고 하기도 하고 부산에 갔을 거라고 추측했지만 아무도 달님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고해성사 같지만 나는 오랫동안 성숙한 달님의 모습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내 인생 사양길에 접어든 지난 봄에 천만뜻밖에도 발신인 주소가 강원도 어느 사찰로 되어 있는 달님의 편지가 왔었다. 그리고 발신인 이름은 정늠연(正凜然)이가 아닌가. 나는 이튿날 그 사찰에 가서 달님을 만났었다.

꽤 아담한 사찰에 비구니만 40명인데 달님은 그 절의 수장이었다. 다시 고해성사하거니와 나는 거의 50년 동안 달님을 여색(女色)으로서 음심(淫心)으로 그녀를 그리워했었다.

그러나 강원도 그 사찰의 뜨락에서 나를 맞이한 달님의 달덩이 같은 그 얼굴에서는 색욕은 커녕 성스러움의 극치를 보았다. 육십이 넘어도 주름살 하나 없는 그의 달덩이 홍안에는 거룩한 해탈과 무아와 무욕의 불성의 빛이 타오르는 듯 했다.

"오라버니 저는 만분의 일도 처음의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초지일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 한 것만큼은 뇌락 같은 기상이 있었음을 자부해요. 저는 한강도 진시황도 억만장자도 부럽지 않아요. 그리고 오라버니께 그때 제가 뇌락 같은 기상을 갖겠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길이었어요. 저는 그때 벌써 불제자가 될 것을 작심했거던요. 이렇게도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운 것은 세속에는 없을 거예요."

나는 그때 정늠연의 회색 법복자락을 잡고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고 말았다. 달님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속세의 더러운 때가 묻은 나로서는 너무도 부끄럽고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예순이 넘고 중이 된 그였지만 그래도 나는 산문입구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그를 색정심(色情心)의 대상으로 생각했던게 얼마나 죄스럽고 부끄러웠던지 이 순간도 나는 나의 혀를 깨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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