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와 바람을 뚫고 한 시간을 달려 성주 사무실에 도착했다. 올해는 유난히 태풍이 많다. 얼마 전 볼라덴과 덴빈이 연달아 한반도에 피해를 주었다. 오늘은 매미와 맞먹는다는 산바가 제주를 거쳐 남해안에 상륙한다. 자칫 지체하다가는 산바와 동행해서 성주로 올 것 같아 출근 시간을 앞당겼는데도 폭우와 바람이 한 시간 내내 나와 동행을 했다.
오늘처럼 비 내리고 바람 부는 날이면 나는 늘 우울하다. 사는 동안 아팠던 일은 기억으로 남고, 행복했던 일은 추억으로 남는다. 비에 관한 기억은 늘 가슴 후비는 아픔이 앞선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비에 관한 아픈 기억들 때문이다.
·외가 가는 길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지 일 년 후, 어머니는 두 살 어린 여동생을 업고 길을 나섰다. 하늘은 먹빛으로 천지가 밤인 양 어두웠다. 네 살 난 나는 비닐우산을 쓰고 어머니 뒤를 졸랑졸랑 따라 걸었다. 집에서 읍내까지 십리, 읍내에서 외가까지 십리를 걸었다.
외할아버지 생신을 맞아 친정을 가는 어머니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남편과 사별한지 일 년. 남은 것은 가난과 시부모와 오남매의 자식이었다. 팔남매의 맏딸이면서 마흔 나이에 과부가 되어 빗속을 걸으며 친정을 가는 어머니 마음은 어떠했을까. 선물하나 준비하지 못하고 친정을 가던 어머니는 아마도 빗속에서 꽤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날 비가 오지 않았으면 서러움도 덜 했을 것이다. 어머니 손에 조그마한 생신선물이라도 하나 들려 있었으면 덜 서러웠을 것이다. 네 살 난 나는 다만 그날 비가 몹시 내렸다는 것과 빗속 이십 리를 걸어 외가를 갔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그런데도 그 아득한 네 살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음은 어머니의 설움이 내게 전이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날을 기억하고 계실까. 이번 추석 친정가는 아내 손에는 예전보다 더 많은 선물을 들려주고 싶다.
·수박 논
고등학교를 졸업한 형은 수박농사를 지었다. 장남으로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가장의 길을 간 것이다. 소유농지도 없어 소작을 얻어 농사를 지었다. 봄에는 수박모종을 심었고, 여름에는 벼를 심었다. 수박모종을 심고 수박이 달덩이마냥 자라는 것을 보며 형의 가슴도 희망이 영글었을 것이다.
수박 수확이 코앞으로 다가오던 시기가 되면 늘 빠짐없이 장마가 시작되었다. 배수시설이 열악하던 당시에는 비가 와서 물이 고이면 양수기로 물을 퍼낼 수밖에 없었다. 낮과 밤이 없이 양수기로 물을 퍼내야 했다. 저지대에 위치한 우리 수박 논은 퍼내도 역부족이었다. 내리 삼년을 수박 한 덩이 수확하지 못하고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
삼년 농사 실패는 희망을 절망으로, 부자의 꿈을 가난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청년의 나이에 빚더미에 앉은 형은 일 년 동안 가출을 하고서야 돌아왔다. 형이 돌아 올 동안 우리 집에는 낮이든 밤이든 희망이 없었다. 절망과 가난만이 지배했다. 장남의 생사도 모른 체 날품을 팔며 가족을 지키던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농군의 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저주스러웠다. 형은 지금은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사업을 하고 계신다. 형도 나도 하늘을 쳐다보며 울고 웃는 농사에서 지독하게도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형제간의 꿈은 이루어졌지만 고향을 지키는 친척들 때문에 이렇게 비 내리면 걱정은 여전하다.
·빗속의 여인
고3 시절이었다. 고1부터 만남이 이루어진 그녀가 금융권에 조기 취업되어 대구로 나갔다. 당시 나는 가난으로 인해 대학진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시생의 삶을 살고 있었다. 소나기가 거세게 내리는 깊은 여름밤이었다. 빗속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어 대문을 열고 나가보니 한 여인이 우산도 없이 비를 흠씬 맞으며 서 있었다.
사랑하는 사내를 찾아 버스를 타고 대구에서 성주로, 성주에서 우리 집까지 장대비를 맞으며 십리 황톳길을 걸어 온 빗속의 여인.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군입대하면서 헤어진 후 그녀 떠난 자리에 앉아 내가 마신 술과 흘린 눈물의 양이 얼마나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 오늘처럼 장대비가 내리면 한잔 술을 마시며 `빗속의 여인`을 부르고 싶다.
이렇듯 아픈 기억과 상처를 주었던 비는 지금도 줄기차게 내린다. 태풍 산바가 바로 가까이 옴이 느껴진다. 거센 바람 따라 빗줄기가 수평으로 날린다. 농부들에게는 태풍이나 폭우는 저승사자와 같다. 태풍과 폭우가 지나간 자리에는 농부들의 절규만 있을 뿐이다. 절망에서 희망을, 포기에서 도전을 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어루만져야 할 것이다. 태풍 산바가 일기예보보다는 조금이나마 점잖게 지나가길 기원해 본다.
네 시간 후, 산바가 덮치자 차는 침수되고 사무실은 책상 높이까지 황톳물이 차올랐다. 나도 수재민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