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가천면 금봉리에 있는 독용산성은 삼국시대에 수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소백산맥의 주봉인 수도산 줄기의 독용산 정상에 이 성이 있다. 독용산성은 조선시대 숙종 원년(1675년)에 순찰사 정중휘가 이 성을 크게 개축했으며 동서남북에 7개의 포루를 두고 여러 개의 문을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전란을 대비해 성주, 합천, 거창의 군량미를 이 성에 비축했다고 한다. 평소에는 성을 지키는 군관과 병사를 파견해 주둔하게 했다. 독용산성은 성주, 김천, 고령, 거창, 합천 등 여러 지역을 방위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서 군사상 중요한 성곽이었다.
1752년 5월에 이 독용산성에 주둔하던 책임자와 관련된 사건기록이 `영영일기(嶺營日記)`에 실려 있다. 영영일기는 조재호(1702~1762년)가 1751년 5월 10일에 경상감사 제수를 받고 1년여 동안 감사의 소임을 수행한 후 1752년 8월 1일 돌아가는 날까지 그가 행한 여러 업무를 기록한 필사본 한문책이다. 이 책은 2004년 3월에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에서 번역 출간했다.
1752년(영조28년) 윤 5월 24일 밤에 독용산성 안에서 별장직을 수행하고 있던 박문두가 놋그릇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도둑맞았다.
지방의 산성에 배치된 별장은 품계가 낮은 종9품직이었지만 성곽 방비의 책임자였다. 별장 박문두는 도둑을 찾으려고 수소문하다가 성 아래에 살고 있는 유기장 조수업의 행동거지가 의심스럽다고 하여 잡아와서 가두었다.
5월 29일 박문두는 조수업을 취조하며 곤장 10대를 때리고 돌려보냈으나 곤장을 맞은 조수업은 다음날인 5월 30일에 죽어버렸다. 그리고 박문두가 잃은 놋그릇 등은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 죽은 조수업의 동생 조대만이 분개하여 박문두를 관청에 고발하였다.
당시의 성주목사 신준과 고령현감 정창유가 조수업의 시신을 검시한 결과 곤장 독에 의한 것이라고 판정하였다.
그러나 죽은 조수업의 아내인 유아기가 공초서에서 "저의 남편은 어릴 적에 나무에서 떨어져 어혈이 있었고 평소에 아팠습니다"라고 하였고, 동생 조대만도 죽은 형이 숙환을 앓고 있었음을 인정하였다.
이에 경상감사 조대호는 조수업이 평소 숙환이 있는데다가 곤장을 맞아 크게 악화되어 갑자기 죽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박문두가 치죄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혐의만으로 사람을 잡아들여 곤장을 친 죄는 크다고 하면서 박문두를 파직시켜 쫓아냈다.
경상감사가 박문두가 가진 인신(직함 증명물)을 성주목사 신준에게 이첩시키고 임시로 새로운 별장을 독용산성으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사건의 전말을 문서로 만들어 조정에 올리고 박문두의 죄를 절차에 따라 처결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 아름다운 사건은 아니지만 250여년 전 독용산성에서 일어났던 이 사건 기록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옛일을 일깨워주고 있다.
절차에 따라 공무를 집행하지 않고 사사로운 판단으로 권력을 남용해 사람을 죽게 한 박문두의 잘못은 명백한 것이라 하겠다. 이런 기록은 우리 성주에 대한 역사 기록 중의 하나이면서 오늘날 공무를 맡고 있는 사람을 경계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