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전세계 전장을 뛰어다닌 체 게바라는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이다. 검은 베레모에 아무렇게나 기른 긴 머리칼, 덥수룩한 턱수염, 그리고 열정적인 눈빛, 굳게 다문 입술... 체 게바라에 관한 전문가로 알려진 장 코르미에는 체의 아버지를 비롯해 체가 살아 생전 관계했던 모든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그의 모습을 전하고 있으며, 그가 남겨놓은 편지글이나 잡문들 거의 대부분을 실어 체 게바라 전기의 최종본을 완성했다.
서문
1년여 전부터 뒤쫓던 볼리비아군에게 생포된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의 차코라는 마을에 있는 라이게라(La Higuera)라는 조그만 학교에서 서른아홉의 나이로 사살되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비쩍 마른 그의 모습은 그 옛날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한 또 다른 '체(ch)' 즉 예수 그리스도와 끔찍하리만치 닮은 모습이었다. 그 둘 다 평등을 위해 투쟁한 박애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선택했던 길은 팔레스티나의 유태인 예수가 걸었던 평화로운 노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낸 뒤 1956년 말, 멕시코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겁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대로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때 체의 나이는 스물여덟이었다. 신을 믿지 않았던 그는 오직 인간만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였다. 그것이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를 쫓는 것이라 해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노력하는 강인한 정신과 용기를 갖고 있었다.
체가 죽은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 동시대인들의 마음속에 신화로 떠돌고 있던 그는 아직도 여전히 신선하게 다가오고 있다. 가치가 전복되고 기계가 중심이 되어버린 파편화된 세계속에 사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그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체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뜨거운 …….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 뜨거운 심장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의 두 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비밀경찰들은 이 영원한 돈키호테의 분신이자 우리 시대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피를 안데스의 산맥에 뿌리도록 만들었다.
사실 최근 수년 간 체 게바라를 다룬 이 책에 큰 관심을 보인 편집자는 거의 없었다.
'세상에, 제정신인가?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 마당에 누가 체 게바라에게 관심을 둔단 말인가……!'
내가 이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그런데 로쉐 출판사의 편집진은 체 게바라라는 나무를 새롭게 재인식시키려는 이 시도에 용감하게 도전하였다. 그것은 그의 생애의 본질을 다루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운 폭넓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긴 이 책에서 내가 특히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그의 온화한 인간성이었다. 사실 이 책을 탈고하기까지는 거의 8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지난 시절의 좌파들은―'체 게바라'에 대한 생각을 보존하고 싶은 아르헨티나의 전사들과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외하곤―그 주제가 자기들로부터 이탈되는 걸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mesto Guevara de La Serna)' 대장이 여전히 그들의 열정에 불을 당기고 있다는 걸 역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기독교도들이 '전사 그리스도'로까지 부르는 그의 재조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지금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예술가와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들은 루브르 광장에서 출발하는 자유의 행진을 계획중이다. 그것은 전세계 사람들이 함께 체가 던졌던 질문을 생각해 보고 답해 보려는 시도이다. 그의 질문은 분화가 가속화되는 지금 이 사회에서 그 무엇보다도 절실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아르헨티나인이었지만 우리 조상들의 문명의 터전이랄 수 있는 유럽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혁명의 발상지인 프랑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우리의 모국이랄 수 있는 스페인도 가보고 싶었죠. 그리고 파라오와 피라미드의 나라인 이집트도요. 아마 몇 주일을 꼬박 고민했을 겁니다. 하지만 에르네스토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대륙이 가장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인으로서 우리의 뿌리를 찾아 떠나자, - --- 실천문학사 『체 게바라 평전』35-61쪽 내용을 옮겨 실었습니다
1943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게바라 가족은 코르도바로 이사하기 위해 다시 짐을 꾸렸다. 아버지가 코르도바에 있는 건축사무소에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에 에르네스토의 바로 아래 누이인 셀리아는 여자중학교에 입학했고 에르네스토는 서민층 아이들이 주로 다니던 데안 푸네스 국립중학으로 옮겼다.
칠레가 288번지에 있던 그 집에서 에르네스토의 막내동생 후안 마르딘이 5월 18일에 태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집 역시 전과 다름없이 '민중의 집'이 되어갔다. 아버지가 '미세리아(miseria, 가난 또는 빈곤이라는 뜻:역자)'라고 불렀던 이웃 동네 아이들이나, 지진으로 동네 전체가 쑥밭이 되어버려 오갈 데 없게 된 아이들이 묵을 곳을 찾아 그의 집에 몰려들었다. 이 시기에 에르네스토는 이모부이면서 좌파적 사상이 담긴 시를 많이 쓴 코르도바 이투르부르의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시를 직접 에르네스토에게 낭송해 주는가 하면 아르헨티나의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애기해 주곤 했다.
비록 천식이 종종 발병하기는 했지만 에르네스토 소년은 무럭무럭 자라갔다. 그는 동생 로베르토와 함께 테니스와 골프를 쳤으며 체스에도 푹 빠져들었다. 그가 그라나도 집안의 삼형제들과 친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들은 토마스, 그레고리오, 그리고 알베르토였는데 누구보다도 당시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학생 시위를 이끈 혐의로 감옥에도 갔다온 전력이 있었던 여섯 살 위의 알베르토였다. 그라나도 형제들은 당시 영국에서 건너온 지 얼마 안 된 럭비라는 낯선 운동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을 따라 리오프리메로에서 열린 럭비시합에 다녀온 에르네스토는 알베르토에게 자기도 럭비를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알베르토는 양볼이 핼쑥하고 호리호리한 이 소년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럭비를 하고 싶다고? 미안한 얘기지만 넌 첫 번째 태클이 들어오는 순간 두 동강 나고 말 걸…….'
그러나 에르네스토의 불 같은 시선을 되받은 알베르토는 일단 테스트를 해보는 것만은 승낙했다. 그는 에르네스토에게 헬멧을 빌려준 뒤 의자 두 개를 놓고 양쪽 등받이 위에 막대기를 걸쳐놓은 뒤 그 위를 그르듯 뛰어 넘어보라 했다.
'두 번, 다섯 번, 열 번, 그는 가볍게 장대를 뛰어 넘었어요. 어찌나 쉬지 않고 열심히 해대는지 내가 나서서 말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죠.'
그날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알베르토 그라나도는 아바나의 미라마르 구에 있는 자신의 집 테라스에서 럼주가 든 잔을 홀짝거리며 마치 바로 엊그제 일어났던 일인 양 그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알베르토는 나중에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었으며 젊은 시절의 친구인 에르네스토를 따라 쿠바에 정착했다. 그 또한 나름의 방식대로 기아와 빈곤과 싸워온 사람이었다. 그는 우유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젖소를 개량하는 데 성공했다. 알베르토는 '체'가 되기 이전의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젊은 날의 모습을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보아온 사람이었다.
에르네스토는 마침내 럭비화를 신을 수 있었다. 그는 럭비선수로서 자신의 예명을 푸리분도 데 라 세르나(Furibundo de la Serna)의 줄임말인 푸세르(Fuser)라 지었다. 비록 그는 돌진하는 형은 아니었지만 공격적인 태클에는 명수여서 얼마 안 가 믿음직한 '옆날개'로서의 제 몫을 다 하게 되었다. 에르네스토보다는 더 동분서주했던 알베르토는 '미알(Mi Alberto:나의 알베르토의 줄임말)'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렸다. 에르네스토는 여전히 갑작스런 천식 때문에 운동장에 나설 수 없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가 호흡곤란을 겪을 때마다 친구나 식구들 중 누군가는 호흡보조기를 들고 뛰어올 채비를 해야 했다. 어느 날인가는 에르네스토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다 못한 부모들은 그가 선수로 뛰고 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SIC(산 이시도르 클럽)―그의 아버지가 창립 멤버 중의 하나였던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럭비 클럽―를 탈퇴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토는 부모 몰래 2부 리그의 아탈라예 클럽에 등록하여 여전히 운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겸손과 복종, 무엇보다 강한 용기를 요구하는 스포츠인 럭비는 뒤마의 『삼총사』에서 나오는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라는 구절처럼 명예를 존중하는 에르네스토의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기질과도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알베르토의 회상에 따르면 에르네스토는 당시 럭비 이외에 다른 운동에도 관심을 보였던 듯하다.
'그는 이십여 미터 아래로 무시무시한 급류가 흐르는 나무다리 난간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균형을 잡곤 했었죠.'
이 얘기를 하며 알베르토는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들과 여남은 장 정도 되는 사진들을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그 중에는 팀 동료들과 함께 찍은 럭비 헬멧을 쓴 소년의 모습도 있었고, 4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아찔한 협곡 사이를 이어주고 있는 좁다란 파이프 위를 걸어가는 모습도 있었다. 그가 럭비 선수로서 얼마나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었는지는 사진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언젠가 그는 아버지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럭비는 그에게 있어 가장 힘든 순간이었던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의 그 혹독한 싸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그는 으레 후반전 중간쯤이면 운동장을 나왔다. 그럴 때마다 그는 팀 동료들에게 멘도사 포도주나 아니면 이상하게도 정신력을 북돋아 주었던 마테차가 담긴 병을 남겨주곤 했다. 그는 평생을 통해 알코올을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1946년에 후안 페론이 권좌에 올랐다. 그때 열여덟 살이었던 에르네스토는 데안 푸네스 대학에 합격해 놓고 있었다. 그는 토목분야를 전공할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약간의 돈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와 친구 토마스에게 교량과 도로를 건설하는 회사인 비알리다드 코르 도베사의 지방 사무소에 '재료 분석' 업무 두 자리를 알선해 주었다. 사실 에르네스토나 토마스 모두 횡령과 독직이 난무하는 그런 세계라면 이미 전에도 겪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47년, 새해 벽두에 에르네스토는 식구들에게 깜짝 놀랄 결심을 알렸다. 천식 때문에 고통받았던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후두암으로 고통받다 돌아가신 할머니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의사가 된다면 주변 사람에게는 그보다 다행스러운 일이 없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올라온 새내기 의대생은 닥치는 대로 자신의 에네르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럭비, 축구, 수영은 그가 특히 열을 올렸던 운동이었고 제1회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릴 무렵에는 체스 선수권 대회와 장대높이뛰기 선수권 대회에도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아 그 해 기말시험 세 과목을 전부 통과했다. 게다가 당시 유고 콘돌레오등을 비롯하여 뜻이 맞는 친구 몇 명과 함께 《태클》이라는 제목으로 럭비 전문잡지를 펴내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직도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콘돌레오는 당시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 주었다.
'우리가 다음 호 작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는데 글쎄 경찰들이 우리 아파트에 밀어닥친 거예요. 우리가 공산당 팜플렛을 만드는 줄 알았던 거죠!'
에르네스토는 '찬조(chancho : 아기 돼지)' 또는 '창조(chanzo)'라는 필명을 장난스레 사용했다. 엄숙함을 거부한 이런 익살은 그의 삶에서 매순간 드러나곤 하던 재치를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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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전세계 전장을 뛰어다닌 체 게바라는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이다. 검은 베레모에 아무렇게나 기른 긴 머리칼, 덥수룩한 턱수염, 그리고 열정적인 눈빛, 굳게 다문 입술... 체 게바라에 관한 전문가로 알려진 장 코르미에는 체의 아버지를 비롯해 체가 살아 생전 관계했던 모든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그의 모습을 전하고 있으며, 그가 남겨놓은 편지글이나 잡문들 거의 대부분을 실어 체 게바라 전기의 최종본을 완성했다.
저자 및 역자 소개
저자 : 장 코르미에
장 코르미에는 일간 의 전문기자로서 체 게바라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전문가로인정을 받아왔다. 1981년부터 그는 게바라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집대성한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켰고,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큰반향을 얻었다.
저 : 장 코르미에
사람들은 더러 체를 자유분방한 무정부주의자라고도 하지만 체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그는 영혼의 순례자였다...사랑이 담긴 희망을 내보였고, 타인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격렬한 의지를 가지고 타인의 삶에 관련된 것들에 무한한 관심을 보였다...그러기 위해 그는 투쟁을 선택하는 용기를 보였다...그가 '모든 진실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뺨이 자신의 뺨에 닿는 것을 느껴야 한다'고 단언했을 때 이것은 '함께한다'는 것을 뜻한다...체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고통까지 함께했다...인류의 세번째 천년이 시작되는 시기에 잊지 않아야 하는 바로 그 휴머니즘의 전도자였다...--- p.664
볼리비아에 있을 때 야영지에서 체가 우리에게 정치와 관련한 강의를 했었습니다. 그때 그는 모든 게릴라 대원들이 볼리비아 사람들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페루를 해방시키려고 했다면 우리 모두가 페루 사람이라는 거였어요. 그리고 아일랜드 해방 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들의 투쟁은 라틴아메리카, 베트남 민중들의 투쟁과 같다. 모든 투쟁이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 적이 바로 제국주의이다.'
그런 다음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은 태양을 향해 당당하게 가슴을 펼 수 있어야 한다. 태양은 인간을 불타오르게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준다. 그가 고개를 숙인다면 그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p.655-656
그들은 재미로 싸우지 않았다. 희생자들의 수의를 놓고 주연을 베풀지도 않았다. 체가 비록 게릴라전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고는 하나 전투란 역시 압제를 해방시키기 위해 특별히 요청된 과정일 뿐이었다. 체는 거리에서 열광하는 군중들의 손을 잡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북부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야과하이로부터 상륙한 카밀로는 그 장면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이긴 뒤 뭘 해야 될지 알 것 같네'라고 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뭔데?'
'나는 자네를 우리에 넣어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자네를 보여주겠네. 그럼 큰 돈을 벌 수 있을 걸세!'--- p.390
게바라를 '그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한 사르트르의 평가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수행한 그 많은 임무를 체 게바라 이상으로 완벽하게 해낸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게바라 아버지인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표현을 빌면 '진실에 대한 광적인 애정'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체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은 이런 완벽주의, 자신이 행하는 일들 중에서 자신의 신조와 배치되는 일체의 경우와 타협하지 못하는 그러한 완고함에서 찾아지는지도 모른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세상에는 권력을 잡은 혁명가가 몇 있다. 레닌이 그랬고 마오가 그랬고, 동부 유럽의 몇몇 사람들이 그랬다. 하지만 죽는 순간에도 혁명가였던 사람은 없었다. 체 게바라는 쿠바 국립은행의 행장 사무실을 택하는 대신 볼리비아 아마존 정글 속 게릴라로 되돌아갔다. '카리브 해의 위기가 야기한 슬프고도 빛나는 시간들'을 지속시키기 위해.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맞는 말이다. 자신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오롯이 견뎌내야 다른 사람의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죽을 때도 함께 할 신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돈키호테적인 신념. 극단적으로, 처연할 정도로 단순한. 게바라의 게릴라 동료였던 벤 벨라는 이렇게 말한다.
"체는 혁명운동을 한 차원 높였습니다. 강하고 신선한 바람 같았지요. 그에게는 뭔가 다른 어떤 것, 완전한 단순함이 있었습니다. 그건 의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인간에게서 발산되는 것입니다."
밥그릇을 채워주진 않겠지만, 또 다른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신념은 필요하다. 팔랑 팔랑 가볍게, 날아갈 듯이 부유하며 살려고 해도 그걸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부당한 것이라고는 생각해도, 그것이 불가능한 꿈을 내용으로 하고 있을수록 더욱 더 그렇다. 자의식은 강하지만 의지가 박약하다면 심플한 인생을 꿈꿀 수 없다.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남이 바꿔주기만을 바라는 사람들, 나의 비루한 예민함에 물릴 때에, 그런 때에 평전을 읽는다. 체 게바라를 읽기 시작할 때도 그런 때였다. 어떤 강력한 리얼리티 같은 것이 필요했다. 가능한 것은 불확실한 형태로 나타나며, 불가능한 것은 늘 확실한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 현실을 똑바로 보고, 거기에서 신념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을 보며 위안 받고 또한 고무 받아야만 했다.
지금 저자를 횡행하는 체 게바라 '현상'이, 가방 속에 담겨져 남아메리카 밀림 어딘가에 묻혀 있을 그의 시신을 꺼내어 척박한 상업주의의 칼날로 다시 그를 난자하는 것이라 해도 늘 있어왔던 일, 담담하게 앉아 있기로 한다. 굶어서 가벼워질 수 있다는데, 몇 끼 식사 정도는 건너뛸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의지박약한, 살아 남은 자를 위한 슬픔의 몫일 뿐이니까.
그저 '오랫동안 전설에 가려져 있던 인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선구자를 찾는 젊은이들에게 다소 의식적으로 불려나와 이제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위악적인 제스쳐가 되는 것일까? 그보다 예전에 보았던 「하이프」라는 시애틀 그런지에 대한 다큐멘터리 이야기. 기타리스트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소파에 널부러져 하던 말. "펑크는 영원할 거예요. 애들(KIDS)이 있는 한은." 체 게바라 '대박'에 대해 한가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려보다가 문득 생각난 얘기다.
"그저 일상의 균형을 단단히 하기 위해 자신을 보완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체는 절대로 자신을 보완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분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있는 부드러움과 강함은 잘 섞여서 너그러움이라는 하나의 돌이 되었다." 아찔한 숭배성 발언이지만, 이런 구절을 읽으면 이기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철든 생각도 하게 되고, 뭐 그렇다는 얘기다.
체 게바라의 신념과 체념을 가슴에 묻고 뚜벅뚜벅 걸어가야겠다는 의지가 솟았다면 낯뜨거운 고백이 될까? 하지만 성숙한 사람일수록 삶 속에서 몸으로 말을 한다. 어렵겠지만 현실에 지배당하지 않고자 한다면 그런 순수한 스텝을 몸
• 미디어 리뷰
혁명가 체 게바라는 에너지가 꿈틀대는 '진보' '자유'의 표상 | 매일경제신문 북카페 허연 기자
혁명가 체 게바라. 검은 베레모에 아무렇게나 기른 머리칼, 덥수룩한 수염, 열정적이면서도 순수한 눈빛, 굳게다문 입술로 대표되 는 체 게바라. 그가 2000년을 맞는 한국에서 부활하고 있다.
지난 3월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 펴냄·김미선 옮김)이 처음 나 올 때 만해도 아무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이 나오고 예상은 빗나갔다. 순식간에 베스트셀러에 올랐 고 두달만에 7쇄를 찍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다시 체 게바라일까. 체 게바라는 진보의 열망을 품었 던 많은 사람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차 각인되어 있는 하나의 캐릭터다. 세계 어느 나라든 뒷골목 풍물시장에 가면 체 게바라의 얼굴을 새긴 티셔츠를 판다. 또 그의 얼굴이 들어있는 시계나 맥주까지 나와있다. 유럽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마찬가지다.
게바라는 하나의 꿈이면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캐릭터다. 평전이나 자 서전이 안 팔리기로 유명한 한국 서점가에서 체 게바라가 잘 팔린 것 도 캐릭터의 위력 때문이다.
책이 처음 나오고 출판사측이 각 대학 구 내에 체 게바라 홍보 포스터를 붙였을때 누군가가 모두 떼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학생들이 집에 붙여 놓기 위해서 가져간 것이다. 테크노와 인터넷으 로 대표되는 신세대 대학생들에게도 게바라는 캐릭터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바라에게는 에너지가 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멋진 이름, 우수에 찬 사진 한장에 고스란히 담겨서 세상속에서 부활하고 있다. 게바라는 꿈의 화신이다. 아르헨티나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의사라 는 안락한 앞길을 버리고 혁명의 길을 나선 꿈의 인간, 혁명이 성공하 면 다시 다른 곳의 혁명을 위해 떠났던 비장함. 그리고 죽음. 체 게바라는 혁명이 성공한 쿠바에서 국립은행 총재를 지내던 시절에 도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했다. 이런 게바라를 보고 사르트르는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체 게바라라는 캐릭터를 만들었고 21세기를 사 는 우리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흉내낼수 없는 한 인간의 캐릭터 에 열광하는 것이다. 체 게바라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의 가슴속 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외치던 그의 말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너무나 인간적인 혁명가 게바라 | 스포츠서울 박인권 기자 | 2000-03-21 |
체 게바라―. 검은 베레모에 손질하지 않은 긴 머리칼.텁수룩한 턱수염.정 열적인 눈빛.굳게 다문 입술…. 아르헨티나의 촉망받는 의사출신으로 인간을 옭아매는 모든 독재에 대항하 기 위해 전세계 전장을 뛰어다닌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 체 게바라.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칭 송했던 체 게바라의 일대기를 다룬 ‘체 게바라평전’(장 코르미에 지음 실 천문학)한글판이 처음 나왔다.
혁명가였지만 너무나 인간적인,인간에 대한 불가사의한 애정때문에 생애 자체가 화제인 체 게바라.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한 중류가정에서 태어 난 체 게바라는 20대 초반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엘리트 였다.
그러나 가난에 찌든 민중의 아우성을 두번에 걸친 남미여행을 통해 확인한 뒤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치유하는게 우선”이라 고 결심,혁명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1959년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체 게바라는 보장된 2인자자리를 스스로 내던진다.쿠바 국립은행총 재 재직당시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던 모습으로 민중에게 강한 인상을 심은 그가 대신 선택한 삶은 아프리카와 남미에서의 목숨을 건 게릴라활동.
1967년 10월9일.31세의 나이에 쿠바혁명을 이끈 위대한 혁명가 체 게바라는 혁명가로서의 삶을 마감한다. 1년전 남미민중해방운동의 요충지인 볼리비아 로 숨어든 그는 볼리비아정부군을 지원하는 미국 CIA의 정보망에 걸려 죽기 하루전 체포된 뒤 다음날 바로 처형당하고 만다.
인간만을 믿으며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던 체 게바라.1956년 멕시코에서 어 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은 39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 그 의 진면목을 엿보게 한다.“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저 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으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체 게바라 평전' 읽기 열풍 | 동아일보 정은령 기자 | 2000-04-15 |
지난달 ‘체 게바라 평전’을 펴낸 실천문학사는 요즘 희색 만면이다. 인터넷, 증권투자, 벤처열풍으로 인문 사회과학서적 매출이 바닥을 치는 와중에 유독 ‘체 게바라 평전’만 발간 1개월만에 1만부 판매를 돌파했기 때문이다. 4월 둘째주 서울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집계 종합순위 4위, 씨티문고 6위….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 등 대학가 서점의 반응은 더 뜨겁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독자 반응을 출판사도, 서점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
현재 출판사가 파악하는 독자군은 두 부류. 1980년대 금서였던 체 게바라를 숨어서 읽은 30대와 대학생을 중심으로한 20대 초반 젊은이들이다. “그런데 20대 독자들의 성향이 잘 이해되지 않아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젊은이들이 체 게바라 브로마이드를 받겠다고 독자 초청행사 몇시간 전부터 와서 지키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도대체 체 게바라를 어떤 의미로 이해하는 것인지….”(실천문학 이순화편집장)
‘체 게바라 읽는 노랑머리들’의 암호를 푸는 코드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된다. 체 게바라 홈페이지(http://cheguevara.com.ne.kr)의 토론방이 그 한 예. ‘홈페이지가 있다는 것을 RATM 동호회 들어갔다가 우연히 보게 됐어요. 요즘 체 게바라 평전을 읽고 있는데…’ ‘전 이분(체 게바라)을 알게 된 게 RATM 때문입니다. 뭐하는 사람인가 궁금했는데…’
방문자들 사이에 체 게바라만큼이나 자주 언급되는 RATM(Rage Against The Machine)은 90년대 초 탄생해 빌보드차트를 휩쓴 미국의 하드코어 록 밴드. 공격적인 사운드에 ‘반제국주의’ ‘반 자본주의’ ‘혁명’ 등 정치적 저항성이 강한 메시지를 담는 이들은 공연때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셔츠를 입거나 기타 앰프에 체 게바라 사진을 붙여 9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 체 게바라를 되살리는 기폭제 역을 했다.
RATM의 노래에 맞춰 헤드뱅잉을 하는 20대에게는 체 게바라의 전기를 읽고 그의 브로마이드를 방에 붙이고 배지를 가방에 붙이는 일이 동일한 맥락의 문화적 행위다. 80년대 세대들이 오로지 종이책으로만 체 게바라에 접근했다면 90년대 젊은이들의 ‘체 게바라 알기’는 하드록, 인터넷 홈페이지등으로 경로가 다양해진 것.
출판사는 정확하게 성향분석은 못했지만 이미 젊은 독자들의 ‘달라진’ 요구에 부응해 가고 있다. 체 게바라 브로마이드 1만장을 인쇄해 사은품으로 뿌린 데 이어 곧 체 게바라 셔츠를 만들어 대학가 서점 등에서 판매할 계획이다.
양서를 읽게 만든 마케팅의 승리 | 한겨레신문 책과사람 김혜숙 (출판사 참솔 대표) | 2002-04-27 |
좋은 책을 펴내고 싶지 않은 출판기획자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좋은 책이겠지. 그렇지만 난 흥미없는걸”이 독자의 반응이라면 그 기획자는 책에게 죄를 짓는 셈이다.
사회주의 혁명을 하겠다고 밀림으로 들어간 게릴라 지도자의 이야기가 2000년대 우리 독자에게 무슨 울림을 줄까? 하지만 결과는 한달 만에 2만부를 넘기는 베스트셀러였다. 인기의 원인은 그의 철학과 삶이 아니라 멋진 이미지였다. `검은 베레모에 턱수염이 더부룩한, 열정적이면서도 우수 어린 분위기의 모험가' 이미지 말이다. 포스터와 티셔츠, 배지 등을 이용한 출판사의 마케팅이 이를 부추겼다. 장한 일이다. 양서를 읽게 하지 않았는가.
1995년 프랑스 출판계도 “이제 와서 무슨 게바라냐”는 반응을 보였지만 결과는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프랑스에는 독자의 감식안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독자의 취향을 알아보는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이 있다고 할까. 양쪽 다 부럽다.
| 경향신문 박구재 기자 | 2000-03-14 |
수탈과 압제, 제국주의에 맞선 그의 게릴라 투쟁은 실패와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가 남미의 제3세계 국가에 전파하려 했던 혁명의 이념은 이제 하나의 ‘전설’로 남았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인, 너무나도 혁명적인 삶은 “무릎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는다”는 한마디의 말이 모든 것을 웅변해준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전사 체 에르네스토 게바라. 1967년 10월 볼리비아의 남부 협곡에서 체포된 그는 다음날 처형됐다. 그는 죽기 두달 전에 쓴 ‘볼리비아 일기’에서 “혁명의 물결 앞에 우리의 목숨은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전문번역가 김미선씨가 우리말로 옮긴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은 20세기 최후의 게릴라였던 게바라의 일대기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장 코르미에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쓴 이 책은 `게바라 평전의 최종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이 시대에 가장 완벽하고 성숙한 인간”이라 평했던 체 게바라는 1928년 6월 아르헨티나의 프티 부르주아지 가정에서 태어났다. 2살때 발병한 천식으로 평생 고생했던 그는 자신을 ‘시인이 되지 못한 혁명가’로 부를 만큼 어릴 적부터 네루다·보들레르·베들렌 등의 시에 심취했다.
53년초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대에서 박사학위와 전문의 자격증을 딴 게바라는 그해 가을 과테말라의 진보정당이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로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다. 그후 게바라는 억압받는 민중들을 위해 총을 들었고 무지와 나태, 부패의 굴레를 벗어난 ‘새 삶의 창조’를 혁명의 대의로 내세웠다.
55년 7월 그는 멕시코에서 카스트로와 운명적으로 만나 '양키'라는 적에게 착취당하는 남아메리카 대륙을 구해낼 방안을 놓고 밤샘 토론을 벌인다. 여명이 밝았을 때 카스트로는 게바라에게 제안한다. '압제자 바티스타로부터 쿠바를 해방시킬 대장정에 동참하자'고.
혁명동지들로부터 '체(기쁨 슬픔 놀람 등을 나타내는 감탄사로 '나의'라는 뜻을 지닌 인디언 토속어)로 불린 게바라는 58년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59년 1월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쿠바 혁명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한 그는 검은 베레모와 낡은 군복차림으로 남미 각국을 돌며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인다.
그 뒤 쿠바에서 2인자 자리를 미련없이 버린 그는 65년 내전중이던 콩고로 날아갔고 이듬해엔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혁명을 위한 게릴라전을 감행한다. 그러나 대오를 이탈한 부하의 배신으로 그는 사선(死線)에 내몰린다.
그 최후의 결전에서 17명의 대원들과 함께 미국이 지원하는 327명의 레인저부대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운명의 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적의 총알이 장딴지를 꿰뚫는 처절한 교전 끝에 게바라는 결국 체포됐다. 그의 유언은 짤막했다. '카스트로에게 전해주오. 이 실패가 혁명의 종말은 아니라고...'
신화로 부활한 '금지된 꿈' | 동아일보 정은령 기자 | 2000-03-18 |
'사랑 없이는 혁명도 없다’던 30여년전 그의 외침은 이제 젊은 세대를 겨냥한 광고문구 정도로 무장해제 돼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의와 인간애 같은 것이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그의 외침은 여전히 박제되지 않은 ‘복음’이다.
체 게바라. 본명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세르나.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1967년 볼리비아 산골에서 처형당한 사회주의자. 97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은 체 게바라 전기의 결정판으로 꼽힌다. 저자는 15년간 체 게바라 가족 동료들의 증언과 그의 일기 메모 등을 모았다. 체 게바라는 하나의 특징으로 유형화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의사이자 고고학자였으며 시인, 언론인이었고 혁명 후에는 쿠바국립은행의 총재도 지냈다. 뿐인가. 아마추어 사진사였고 베레모에 군복을 입고 골프를 치면서 시거를 즐겼다.
그러나 체 게바라를 혁명가로 만든 현실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세상을 위해 인술을 펴겠다는 꿈을 품었던 햇병아리 의사의 가슴에 ‘변혁’의 열망을 심은 것은 칠레 추키카마타 구리광산의 모습이었다. 미국인 광산소장이 하루 수백만달러의 수익을 거둬가던 광산의 거대한 노동자용 공동묘지. “얼마나 묻혔나요?” “대략 1만명” “미망인들과 자식들은 어떤 보상을 받았나요?” “…”
그러나 혁명가로서의 그는 고독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맹주였던 소련을 향해 “어떤 점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도 제국주의적 착취에 일조를 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사회주의는 성숙되지 않았다. 그 안에는 많은 오류가 담겨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혁명의 성과를 즐기는 기득권층이 됐겠지만 그는 다시 군화를 신고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총살당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네 자녀에게 남긴 편지는 이랬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너희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그것이 혁명가가 가져야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체 게바라-루터 킹' 전기 나란히 출간 | 세계일보 | 2000-03-22 |
남미의 전설적인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 미국 흑인인권운동의 대부 마틴 루터 킹의 전기가 나란히 출간됐다. 두 사람 모두 가난과 억압에 대항해 가장 인간다운 사회적 삶을 살았던 전형적인 인물들로 사후에도 오랫동안 존경받는 대표적인 존재들이다.
'체 게바라 평전'(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실천문학사)은 게바라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해 프랑스에 출간되자마자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켰고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돼 큰 반향을 일으켰던 책이다. 전기작가 코르미에는 이 책에서 게바라의 아버지를 비롯해 그가 생전에 관계했던 모든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모습을 전하고 있으며 그가 남긴 편지글이나 잡문들을 대부분 함께 수록했다.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한 중류가정에서 태어난 게바라는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는 두번에 걸친 남미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목도한 뒤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더 본질적이라는 자각을 하게 됐다. 멕시코에서 카스트로 형제와 만난 뒤 그는 구체적인 쿠바혁명에 돌입한다.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벌이며 혁명군을 모아 1958년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 뒤 게바라는 쿠바 정부에서 요직을 역임했지만 쿠바 2인자의 자리를 버리고 새로운 혁명을 위해 자신을 또다른 사지를 향해 스스로 몰아갔다. 결국 게바라는 볼비아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도움을 받은 정부군에 의해 체포돼 처형당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그를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 칭했고, 사람들은 그가 '시대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인간' 혹은 '이상을 꿈꾸는 인간의 대표'로 추앙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자서전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클레이본 카슨 엮음,이순희 옮김.바다출판사)는 킹 목사의 생애와 사상은 물론 지금도 미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킹 목사 암살의 거대한 음모까지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킹의 삶은 '사랑과 정의를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열망' '폭력과 위선으로 가득한 세계에 맨손으로 맞선 용기' 등으로 정의되곤 한다. 어린 시절부터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을 목격하면서 불의의 사회를 개혁하려는 열망을 지녔던 킹은 폭력이 아닌, 정의의 몸짓으로 미국의 흑인인권운동에 불을 붙인 사람이다. 불의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번번이 경찰에 연행되어 감옥에 갇히고, 피부색에 근거한 아무 근거없는 편견에 사로잡힌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서 온갖 협박과 테러,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육신은 살해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부르짖었던 '정의'는 지금도 살아남아 흑인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기려지고 있다.
휴머니즘 무기로 혁명의 정글을 헤치다 | 한겨레신문 고명섭 기자 | 2000-03-06 |
1968년 5월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학생혁명'의 깃발은 라틴아메리카가 낳은 한 게릴라 지도자의 초상과 함께 거리와 캠퍼스에 물결쳤다. 별이 달린 베레모를 쓰고 턱수염과 콧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인 눈빛을 지닌 얼굴이었다. 이 얼굴과 나란히 “바다와 대지 위에 체라는 혁명의 태양이 떠오른다”고 쓰인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본명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그의 동지와 이웃들이 그냥 `체'(친구)라고 부른 게바라는 학생혁명의 주역들이 가슴에 품었던 모든 이상과 열정의 가장 적절한 상징이었다. 살아서 이미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죽어서 전설이 된 이 혁명가의 길지 않은 일생을 그린 전기 이 우리 말로 옮겨졌다.
프랑스의 저명 언론인 장 코르미에가 95년 탈고한 이 책은 밀림의 게릴라 지도자, 전투적 공산주의자로 각인된 게바라의 총체적 인간상을 밀도 있게 펼치고 있다. 지은이는 게바라의 맏딸 일다, 그의 아버지 에르네스토와 장시간 면담을 하고 그가 남긴 일기·책자 및 그와 관련된 자료를 두루 끌어모은 데다 게바라가 발자국을 남겼던 라틴아메리카 곳곳을 직접 답사한 끝에 670쪽에 이르는 두툼한 저작을 완성했다.
39살로 세상을 뜬 게바라의 삶은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1955년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으로 만날 때까지가 그 첫 시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 시기는 카스트로의 오른팔로서 쿠바 혁명을 위해 게릴라 투쟁에 뛰어들어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낸 1959년 1월까지다. 정치가 겸 행정가로 탈바꿈해 혁명 정부의 중앙은행 총재, 산업장관, 전권대사를 지낸 1965년까지가 세 번째 시기에 해당한다면, 카스트로와 헤어진 뒤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다시 밀림으로 들어가 게릴라를 이끌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등에 업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붙잡혀 총살된 1967년 10월까지가 네 번째 시기를 이룬다.
이 네 시기를 면밀히 추적하면서 지은이가 거듭 부각시키는 것은 체의 인간적이고도 다면적인 면모다. 진보적인 생각을 지녔던 부모 밑에서 자란 게바라는 어린 나이에 벌써 정치적인 견해를 내보였다. 스페인에서 프랑코 장군이 내전을 일으켰을 때, 여덟살의 게바라는 “다른 아이들이 도둑과 경찰로 편을 갈라 놀 때 공화파와 프랑코파로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했다.”
지칠 줄 몰랐던 활동성은 그의 또다른 특징이다. 지은이는 이 활동성을 두 살 때부터 시작되어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힌 천식과 관련짓는다. 천식의 발작이 올 때마다 죽음의 문턱을 보았기 때문이었는지 그는 삶을 “다른 사람의 두 배, 세 배로 농축해” 살았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거의 모든 운동이 그를 매료시켰다. 특히 럭비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대학생 게바라는 이라는 럭비전문잡지를 발간하기조차 했다. 이때의 운동이 “나중에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그 혹독한 싸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활동성은 육체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책을 놓지 않는 독서광이었고 끝없이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를 알레르기 전문 의사이자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로, 작가·언론인·사진가·시인·체스선수로 만들어주었다. 이를테면, 그는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의 전장에서 게릴라들을 이끄는 지도자였고, 전투가 끝나면 부상병을 치료하는 군의관이었으며, 문맹의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혁명정신을 일깨우는 교사였다.
그는 투철한 평등주의자였다. 그는 지도자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동시에 지은이는 체가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으며 풍부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였음도 빼놓지 않는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시가를 유별나게 좋아했던 그에게 친구들이 건강을 위해서 담배를 끊으라고 했다. 그는 하루에 딱 한대만 피우겠다고 해놓고선 다음날 1m짜리 시가를 주문했다.
지은이가 체의 인간됨 가운데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 그의 정직성이다. 그는 대사로서 외국을 순방하면서 미국의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소련의 패권주의도 가차없이 비판했다. 이것이 결국, 소련에 의지하고 있던 카스트로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지은이에 따르면, 체가 장관직을 그만두고 밀림으로 다시 들어간 것은 카스트로에게 더 이상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는 뜻이 컸다.
체는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요 공산주의자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스탈린식 공산주의와는 전혀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그에게 마르크시즘이란 순수함 자체였다.” 산업장관 시절 체를 만나 열띤 토론을 벌였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뒷날 그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했다. 지은이는 공산주의가 몰락한 지금도 체 게바라를 추모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그의 삶의 밑바탕에 깔린 `휴머니즘'에서 찾는다. 게바라는 “모든 진실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뺨에 자신의 뺨이 닿는 것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책은 95년에 나온 탓에 체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의 유해는 지난 97년 볼리비아 바야그란데에서 발굴돼 사망 30주기를 맞은 그해 10월17일 쿠바의 산타클라라 묘지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