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6호에서 이어짐) 김창숙이 백세각을 찾아온 건 공교롭게도 회당과 교신한 다음날 오후였다. 그는 의성김씨로 성주 대가 사도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학문에 재주가 많았으나, 천성이 남에게 얽매이는 걸 싫어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잃고 난 후인 20세 무렵부터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는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에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매국노 처단을 상소하고 구습혁파와 계급타파에 앞장서는 등 활발한 사회 운동을 벌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유림이 이에 참여하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중, 재경유림들과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에 보낼 청원서를 작정하기로 하고 전국 유림의 협조와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이었다. 그런 그가 영남 유림의 거두 중 한 사람인 공산을 찾아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건 천도교를 위시한 세 종파로, 결과적으로 우리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고루하고 썩은 유림들과 더불어 일하기 부족하다고 꾸짖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미 이런 나쁜 오명을 뒤집어 덮어쓰게 되었으니 무엇이 이보다 더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심산은 자조와 울분의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피를 토하듯 격정을 쏟아냈다. 매사 에두르지 않는 강직한 그의 성품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자네 말대로 이 부끄러움을 씻어내지 못하면 우리 모두 유교의 큰 죄인이 될 것이네."
공산은 참담한 마음으로 심산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자네에게 무슨 좋은 방안이라도 있으신가?"
"지금 유림으로 독립운동에 동참하고자 서울에 모인 자가 거의 수십만 명에 이릅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지금의 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우선 그들이 대동단결하도록 도모해야합니다. 진실로 단결만 된다면 유교가 이 큰 흐름을 능히 주도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 말문이 트인 심산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지금 손병희 등이 선언문을 발표해서 이미 국민들의 충의는 충분히 고취됐으나 아직 세계에 나가 활동하는 기관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손병희 등과 더불어 서로 호응해서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열국대표들에게도 소청하여 공의를 더욱 크게 펼쳐서 우리의 독립을 인정토록 한다면 우리들 유림도 광복운동의 선구로 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심산은 유림들의 보다 광범위한 동참을 촉구하여 의(義)의 깃발을 세우게 하고자 그 방안을 특별히 상의하러 온 것이었다. 그는 공산에게 거듭해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국제 여론을 조성하여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통문을 만들어 국내에 널리 공포하여 동포들과 더불어 눈을 밝게 뜨고 담을 키워 곳곳이 한 목소리로 두 임금의 신하가 안 되겠다는 의리를 밝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심산은 이러한 국제적 활동이 실패를 하더라도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며, 일제에 발각되는 경우 구속 소동이 일어나게 되어 안일에 빠져있는 유림을 각성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면우(俛宇 郭鍾錫) 어른과 회당(晦堂 張錫英) 어른은 우리 지역의 큰 원로이니 함께 일할 것을 먼저 의논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심산은 서울에 있을 무렵 인산배관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온 면우의 조카 곽윤과 김황에게 이미 면우 선생에게 유림대표가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청원서를 준비하도록 요청해둔 상태였다.
그러자 공산이 그간 이달필이 백세각을 다녀갔던 일을 설명하고 그 경과를 알려 주었다.
"회당은 이미 승낙이 있었으니, 내일 규선과 더불어 다전에 같이 가서 좀 더 세부적으로 의논을 해 보시게. 면우 선생은 영남유림의 양심을 대표하는 분이니 기꺼이 선봉이 될 것이네. 그 어른으로 하여금 파리장서를 지으라고 한 뒤에 각처로 나뉘어 가서 유명 인사들을 수합하되 반달을 기한으로 하여 성취하는 것이 어떻겠나?"
심산은 공산이 시원시원하게 일을 진행하는 걸 보고 내심 만족해하고, 송규선과 함께 다전으로 향했다.
공산은 우선 이번 거사의 연락 본부를 백세각으로 정하고, 심산과 송규선으로 하여금 면우선생과 협의하여 청원서의 초안을 작성하도록 하는 한편, 셋째 아들 송수근을 장석영에게 보내어 국내 유림에게 보내는 취지문을 작성케 한 뒤, 송희근과 여보회가 경비를 부담하여 취지문을 인쇄한 다음 이를 여러 유림에게 돌리면서 서명을 받았다.
불과 십여 일만에 심산과 송규선 두 어른이 각각 국내의 여러 명첩을 거두어 오고, 정종호 어른 또한 동남쪽의 명첩을 거두어오니, 도합 약 백여 인이 되었다. 그중 가장 드러난 사람은 곽종석, 유필영, 이만규, 이능학, 장석영, 김건영, 정재기, 노상직, 이덕후, 김복한, 임한주, 최중식, 김덕진, 안병찬, 김형모, 권상익, 김동진, 성대식, 하룡제, 전양진, 하겸진, 유연박, 송홍래 등 137인인데, 원래 143인이었으나 가문들의 만약의 사태를 위해 종손들을 제외했다.
곽종석이 지은 파리장서가 다 갖추어지고 모든 명첩 준비가 끝나니, 백세각은 한층 고무된 분위기였다. 일이 이처럼 순조롭게 진행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않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준비가 끝나자 예상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천만리 머나먼 이국까지 청원서를 전달해야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모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무사히 실행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일찌감치 서양문물을 접해온 심산이 선뜻 지원하고 나섰다.
"제가 일찍이 그쪽에 관심이 많아 지리와 문물 등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지 않으니 제가 가겠습니다."
그의 오래 전부터 이미 나라를 위해 생명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산하가 몇 천만 리인데 어찌 자금도 없이 도달할 수 있겠는가?"
송회근이 선뜻 노자로 일천 원을 내어 송수근을 시켜 전달하였다.
출발시기에 다달아 공산이 송수근을 불렀다. 일천 원으로는 여비가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았던 것이다.
"복명동의 여보회는 뜻이 있는 사람이다. 네가 즉시 찾아가서 말씀드려 보라."
송수근이 밤을 이용하여 여보회에게 찾아가서 그 사실을 모두 이야기하니, 그는 흔연히 듣고 따르면서 이천 원을 도와주었다. 다음날 새벽에 심산을 찾아가서 전해주니, 심산은 전대에 넣고 진주 이길호의 처소로 향하여 갔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