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3호에서 이어짐). 그런데 그 무렵 동포동에서 오인오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유림이 아니라 예수교인이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3월 28일 성주장날을 기회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한 일이 있으나,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자 세력에 한계를 절감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 교도 백여 인이 오는 장날에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데, 합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백세각의 대표로 나선 송규선은 독립운동에 반상과 종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기꺼이 허락했다.
"좋습니다. 그리고 이왕 그렇게 할 거면 우리와 일을 나누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합니다. 귀교의 사람들이 먼저 관왕묘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면서 움직이면 경찰들이 저지하고 체포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 피해 멀리 달아나십시오. 우리는 그 기회를 틈타 각처에서 벌떼 같이 일어나 만세를 부르면 형세가 심히 웅장할 것이니,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오인오가 좋은 생각이니 그렇게 하겠다며 약속을 정하고 돌아갔다.
4월 2일, 거사일이 되어 대낮에 만세를 거행한다는 보고가 있자 공산은 송수근 등으로 하여금 가서 보게 하였는데, 장날이라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이 만여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중의 뜻이 시끌시끌한 것이 갇혀있는 물이 아직 터지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경찰청에서 이미 조짐을 알고 더욱 보호병을 파견하여 종횡으로 충돌하며 검문하고 사찰하는 것이 엄밀하였다. 총을 멘 헌병 몇 사람, 일본 순사, 조선 순사 및 평복 순사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후 2시40분 먼저 시장 뒷산에서 5~6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시장 쪽을 향하여 큰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순간 시장 안에 미리 들어와 있던 송우선, 김희규, 송천흠 등 유생 50-60명이 두세 길이 되는 주막집 지붕에 올라가 손에는 태극기를 휘두르고 입으로는 만세를 부르면서 중외를 선동하니, 온 시장 사람들이 모두 메아리와 같이 호응하여 혹은 동쪽에서 일어나 부르고 혹은 서쪽에서 불러대었다.
순찰 돌던 순사가 깜짝 놀라 일행 중 주동자로 보이는 사람을 체포하여 경찰서로 연행하자 군중들의 분위기는 경악되기 시작했다. 시장 뒷산은 온통 흰옷으로 뒤덮여 그 수는 이미 2~3천명이 넘을 듯 했다. 그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읍내로 몰려왔다. 경찰서 앞에서 남쪽 군청 앞과 그 양편 좁은 길에 약 5~6백명이, 그리고 동쪽 우체국 앞에서 시장 앞까지 약 1천명이 밀어 닥쳤다. 경찰이 여러 번 해산을 명령했으나 그들은 전혀 듣지 않고 더욱 더 살기를 띄고 열광적으로 만세를 부르므로 사태는 험악해졌다. 저들이 비록 채찍질하고 몽둥이를 휘두르고 포박하며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인산인해로 한없이 모여드니 능히 금할 수가 없었다. 이에 경찰은 허공에 총을 쏘아대며 해산을 명령했다.
하지만 한 번 불붙은 의기는 꺾이지 않았다. 저물녘이 되자, 탑거리 앞에 삼사백 명이 운집하여 만세를 크게 부르면서 나아가고 또 수백 명이 세 갈래로 나뉘어 산으로 올라가면서 앞에서 부르면 뒤에서 응하고 왼편에서 부르면 오른편에서 답하였다. 이에 우리의 기세가 더욱 장대해져 용기가 나고 분이 격동되어 죽음에 나아가도 피하지 않았다. 시위대는 해가 진 후 서북편 산 위에 다시 집결하여 불을 피우며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했다.
해가 지면 시위대가 읍내 일본인 가옥에 불을 지르고 경찰서 습격을 모의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이에 대비하여 경찰서 직원들과 그 가족들을 경찰서로 피신시키는 한편, 순사 및 순사보 3~4명씩 조를 편성하여 순찰을 돌았다. 오후 10시경 시위 군중 약 100명이 시장 안에 닥쳐왔다. 즉각 해산을 명령했으나 듣지 않고 계속 만세를 외쳐 보다 강력한 해산을 명령했다. 그럼에도 이들 시위대는 해산 명령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돌을 던지며 저항해왔다. 당황한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마구 총을 쏘아댔다. 송천흠이 성주경찰서 옥상에 올라가 기왓장을 던지며 만세를 부르다가 마침내 총을 맞고 쓰러지니 선혈이 낭자하게 흘렀다. 시위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났는데, 이때 2명의 시위대원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7명은 부상을 입었다. 잡혀간 사람은 육칠십 명에 이르렀는데, 송우선, 송훈익, 송문근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사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독립을 염원하는 기원은 인근 마을로 들불처럼 번져나가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이어졌다. 망국의 어둠을 깨우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뜨거운 몸짓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