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는 세상, 생과 사는 일상사인데 우리 성주 지명인사들이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니 비감이라 해야 할지, 무상이라 해야 할지 마음이 참 무겁다.
유성환 의원님이 별세한 지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신동욱 의원님의 부음까지 듣자니 애상(哀想)은 더욱 가중이다.
내 나이 20세도 전일 때 우리 군 출신 정치인들 관심을 가졌었고 또 당연히 그 나이에는 `정치`보다는 `정치인`에 더 마음을 둘 때이니, 기성 정치인보다는 새 인물에 관심을 더 갖는다
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우리 성주에 참신한 신예 정치인이 나타났으니 바로 신동욱 의원님이었다. 그땐 모두 `혜성` 같이 나타났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각 계층, 노소 없이 새로운 인물이라는 평가가 `사랑방의 여론`을 주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신동욱 의원님은 6·25에 참전했다가 전상을 입어 전역했다.
휴전이 되고 참전 상이용사들의 예우와 복지 때문에 상이용사회가 결성되었고, 그 각종 지역 회합에 성실히 참여하여 인지도를 넓혔으니 곧 그의 인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때 들은 얘기로는, 그는 `언제나 회의장 말석`을 지키면서도 아주 소소한 일도 `대충`이 없고, 이른바 `공익의 목적`에 철저했으며 자기 소신에 충실했다고 했다.
그러던 중 그 활약상은 중앙무대로 옮겨져 `사단법인 한국상이군경 중앙회`의 회장 중책까지 맡게 됐다고 했다.
당시 내 큰형님은 면서기에 봉직했으므로 어느 날 가져온 신문(내 기억으로는 `상이군경회지`로 안다)에 신동욱 의원님이 비행기 트랩에 서서 손을 흔드는 모습의 사진이 찍혔다.
동남아국가(아마도 월남이 아닌가 한다) 어디엔가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한 후의 귀국하는 모습이라고 신문 기사는 설명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손을 흔들며 파안대소 하는 그의 모습은 눈에 띄게 이채로웠으며 자그만 흥분이기에 충분했다.
지금에 비하면 신문도, 사진도 조잡한 수준이어서 겨우 윤곽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신문의 사진이 곧 잊히지 않는 연유는 따로 있다.
내 고종 형님의 사촌 김영희씨가 신동욱 의원님의 비서실장이었으므로 내 고종형님을 통해서 그분의 활약상을 간접이나마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랑방에서 신 의원님에 대해 아버지와 고종형님이 환담을 나누는 것을 보기도 했으니 더욱 그러하다.
어느 해 신 의원님의 달력을 받았는데, 그때는 내 어휘력 부족의 탓도 있어서 그냥 `미남`이라고 했지만, 지금 같았으면 대단히 죄송하지만 `청수(淸秀)` 아니면 감히 `미목수려(眉目秀
麗)`라고 하지 않았을까 한다.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신다면 그땐 정말 `미청년`이었다고 하고 싶지만 고인이 되신 분에겐 올릴 수 없는 수사(修辭)이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말이다.
그후 `민의의 전당` 의사당에 입성하시는 신 의원님을 본 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뭔지 모를 희락(喜樂)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신동욱 의원님!
재경향우회에서 이름 없는 소시민인 저와 담소를 나눠주시던 그 인품의 존안도 이제는 뵐 수도 없으니 참 허망합니다. 이 허망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으오며, 그 훈향(薰香)을 또 언제 받으오리이까?
언젠가 의원님이 식사라도 한 번 하자고 했을 때 저의 불민함으로 완곡히 거절한 것이 이제는 여한으로 남습니다.
신동욱 의원님, 부디 영면하시고 영생안락을 누리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