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열 살 전후일 때 선대(7대조와 그 아랫대) 묘사를 어른들 따라 몇 번 가본 이후 60여 년 만에 참사(參祀)를 했다. 참으로 죄송스럽지만 생업 때문에 잊고 살다시피 했음은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7대조 묘사에는 제관이 통상 3~40여 명이었지만 이번엔 10여 명이었다. 그것도 7~80대가 주류였다. 솔직히 말해 숭조의 개념도 세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너무 많이 변해버린 오늘을 보자니 조금은 허허로웠다. 제일 큰 변화는 주손(胄孫)이 없고 그나마도 방손(傍孫)만 있다는 말이다. 사실 60년대의 묘사, 기제사와 양대 명절 차례는 연중 `3대 숭조` 행사였다. 그랬는데 지금은 제수도 이른바 조율이시, 홍동백서 등 격식은 그대로지만 약설(略設)이 일반적이었다. 이에 반해 헌관과 축관의 전례는 전통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농본사회일 때부터 이어오던 전통을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오고 있어도 그나마라도 이어가겠지만, 앞으로는 어떤 세태의 변화가 올까는 쉽게 예단하기가 어렵다. 다만, 숭조의 정신만은 불변이겠지만 당대가 아니면 조부대까지는 아닐까 하는, 내 조심스러운 단견이다. 근간에 본군 문화원장을 여러 해 역임한 선배 제수천(諸洙千) 님을 방문했더니 자저(自著)한 `가야동천인`이라는 저작물을 주는 것이었다. 거기 깜짝 놀랄 기록이 있었다. "···최무선은 여말 화약과 병기를 발명하여 양촌 권근의 찬사를 받았고, 그 손자[*직손은 아니고 방손] 최흡(崔洽)의 아들인 최일(崔壹)의 부인은 김해송씨인데 조선조 초 태종이 부모를 일찍 여읜 외손자 권총(權聰)을 특히 아껴서 양육할 부녀자를 구할 제, 유향(儒鄕)인 성주에서 예절 바른 명가 출신을 원해 최일(군기감)의 부인이 선발되었으니 그가 시와 예의 가법으로 길러 도총제에 이르게 했고, 최일의 아들 최흥효는 홍문제학이며 서법으로 명성이 높다. (···)" 이런 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데에 두 번 놀랐다. 선조의 뚜렷한 문집이나 기록된 행적이 없으면 먼저 족보를 보는 것이 순서다. 거기 일의 행적은 판군기시사를 지냈으며 부인[令人] 김해송씨는 묘소도 "성주동면화곡방마근동해좌`예장`유갈"이라 돼 있었다. 솔직히 말해 평소에는 별 관심도 없었고 혹시 보더라도 건성건성이었으니 그런 칭송의 뜻이 있을 "예장(禮葬)"의 연유를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모두 알았겠지만 6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구전(口傳)이나 전적(典籍)도 남기지 않았으면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했다. 성리학의 질서가 뚜렷할 때 태종의 외손자를 훈육했다는 부인 김해송씨는 묘소도 있는데, 그 남편인 壹의 묘소는 세거지인 경기도 고양 원당리 `실전`이라고만 돼 있으니 의아함도 좀 있다. 자연인 송씨부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왕의 외손을 길렀다는데 그 남편은 묘소도 없으니, 후손으로서는 이건 뭔가 분명한 함의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추리도 해봤다. 그래서 제수천 선생의 저작물에 명기가 돼 있는 그 송씨부인의 행적 원전(原典)이 어딘지를 물었으나, 관계 종문들 간의 문제이니 말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내가 모두에게 이해득실이 없을 `상찬의 뜻만 있는데`라고도 했지만-. 권총이 지중추부사 혹은 도총제에까지 벼슬이 올랐으니 그의 본향인 안동권씨 대종회를 찾았지만 그들도 모르고 있었다. 혹시 정사의 기록은 없더라도 당시 실권자(태종)의 외손자이니 `궁중야화`의 형식으로라도 있지 않을까 하여 조그만 기대도 했지만 그것도 없다고 했다. 모르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성주 온 향내가 다 아는 `법산숭효원`도 모르고 있었다. 모르는 것은 우리 송씨부인이나 그들 권총의 일이나 똑같았다. 이 기회에 선대 문중사도 조금은 알았으면 하는 의미로 몇 마디 쓰고자 한다. 9世 壹의 직계는 아니지만 그 당시 따님(貞夫人) 한 분이 창령조씨(曺信忠) 가문으로 시집가서 아들 5형제를 뒀는데 모두 이른바 `오자구등과(五子具登科)를 했다. 철저한 유교사회에서, 특히나 다섯 아들 모두가 등과를 한다는 것은 가문의 영예인 동시에 자존심이다. 내 친구 창령조씨(曺仁鎬)를 만나기만 하면 우리 영천최씨를 고맙다고 하는 말이 얘기의 시작이다. `길사 얘기하다 흉사 얘기하는 꼴`이지만, 이 권총의 문제와 지난번 참사한 묘사와 연결 짓자니 맥락상 좀 어색하지만, 그러나 `조상의 문제`라는 데에는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하여 적어 보는 것이다. 지금의 3대 숭조 행사는 내 어릴 때와 비교하면 명맥은 이어가지만, 참으로 많은 변화가 온 것만은 분명하다. 더구나 그때와는 상상도 못 할 풍요의 시대도 왔는데 말이다. 부끄럽지만 바로 말하면, 내 당대 부모도 지켜온 전통을 뒤로 하고 자손들 편리성만 따져 제례를 치러 온 것이 십여 년이 됐으니 우선은 죄민스럽기도 하다. 하긴 살 같이 변화해 가는 세태를 누가 거역할 수 있으며 거스를 수도 없는 문제인 것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이 변화하는 오늘의 세태지만 상장례와 제례는 아직도 전통문화로 크게 자리하고 있다. 비록 그 많은 격식은 다소 소략(疏略)해지긴 했지만 숭조의 마음은 그대로이다.
최종편집:2024-05-21 오전 09: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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