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이 꽃을 좋아하듯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여자에게는 꽃을 상징하는 방년이 있고 계절을 나타내는 만화방창, 모두 선망하는 아름다운 꽃길 등 꽃말이 들어가면 온 세상이 밝아지고 희망으로 가득 찬다.
화단에 심는 화초는 꽃을 보려는 것이지만 꽃도 보고 열매도 따는 일거양득의 것도 있다. 지난봄 화단 모서리에 오이씨와 고추씨 너덧 알을 묻었다. 한 사나흘이 지나니 무슨 귀이개처럼 생긴 놈이 삐죽이 호기를 부리며 올라 왔는데 그놈이 오이 세계의 시작이었다. 그 다음 날은 올라온 쌍떡잎이 마주보고 있고 그 사이에는 형체도 가늠하기 어려운 쌀알보다 더 작은 놈이, 마치 내 안에 온 우주가 담겨 있는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신기하지 않느냐는 듯도 했고 비웃는 것도 같았다. 자연의 섭리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생명의 근원인 햇살이 따뜻해지니 쌍떡잎은 제 할일 다 했다는 듯 쪼그라든 누런 형체만 남았고, 그 쌀알만 한 놈은 어느새 한 뼘이나 자라 설치해 놓은 그물을 타려고 방향을 잡고 있었다. 낮엔 바람이 없어도 흔들거려 무슨 춤이나 추는 줄 알았다가 밤 자고 나면 고무줄 늘어나듯 자라고 있었으니, 낮에 흔들거린 것이 마치 나를 보고 `이렇게 해야 크는 것임을 몰랐지···` 함이 분명했다.
오이와 동시에 심었지만 한 사나흘이나 늦게 고추도 올라왔다. 늦게 나왔지만 함께 살자며 오이와 화초 사이를 비집고 자리 잡고 있었다. 공유(共有)는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도 똑같다고 하는 항변이었다. 덩굴이 스스로 바로 서지 못 하고 다른 몸체를 덩굴손으로 감아 오르는 이른바 전요(纏繞)식물인 오이와는 다르게 고추도 Y자형을 이루며 마치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를 보이려는 듯 오이와 경쟁하자며 자랐다.
사람 키 높이나 자라던 어느 날 오이는 잎겨드랑이에서 노오란 꽃망울을 마치 사춘기라도 되는 듯, 수줍은 듯 살포시 내밀었다. 다음 날은 내 언제 수줍어했느냐는 듯 방자하게 꽃들을 활짝 피워내고 있었다. 덩달아 나도 지지 않겠다는 듯 고추꽃도 피었다.
오이나 고추나 피는 꽃들이 무성시(無聲詩)이기라도 되려는지 바로 쏟아내는,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아우성이기보다는 역시 소리 없는 파안대소가 더 정확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든 존재의 내면엔 소리가 있고, 접시도 깨질 땐 소리를 낸다고 하던가?
오이꽃은 꿀벌이 정오각형 집을 정확히도 지어 내듯 하니 장공(匠工)이고, 정오각형의 고추꽃은 명인이 찍어낸 듯한 조각 작품이었다. 아무도 그 공정을 짐작도 할 수 없게 찍어 낸 명품이었다. 어느 꽃이나 만발하면 그 뽐내는 `소리 없는 소리`는 청각적 즐거움을 부르고 장공으로, 명인으로 뽐내는 그 자태는 보는 이의 `손길`을 유혹하지만 그 고결함에 손을 대지 말라는 듯 오만함까지 했다.
오이꽃은 석양의 노을이요 고추꽃은 새벽녘의 샛별이며 바로 계명성이었다. 오이꽃은 옥쟁반을 받치는 황금의 잔이요 고추꽃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 은하수였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깜찍한 오각형 별꽃이었다. 장엄하고 우아한 목단화는 아니었다.
날 때부터 우는 꽃은 없다. 오이꽃이 환호성의 웃음이라면 고추꽃은 `눈 깜짝할 사이`라는 의미의 발랄한 웃음이었다. 세상의 곱다는 얼굴, 예쁘다는 웃음을 다 모아 쏟아내고 있었다. `해맑은 웃음···` 정도로는 그 웃음을 나타낼 수 없어 `자지러질 듯, 넋을 빼앗길 듯` 함이 제격이었다. 세상의 모든 웃음을 그 조그만 오각꽃에 다 담았다. 어찌 보면 요염도 했지만 그런 저급한 웃음은 아니었다. 어느 시인이 `···자세히 봐야 예쁘고, 오래 봐야 사랑스럽다`고 했지만 난 그 모두를 이를 것도 없이 좋기만 했다.
소리 없는 그들 꽃웃음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고추는 꽃마다 고추를 달고, 오이는 암꽃의 씨방이 자라더니 도깨비방망이 같은 오이가 달렸다. 역시 자연의 섭리란 게 이런 것이라는 듯했다.
`여든에 철 든다`이듯 이를 보노라니 싹이 트면 잎이 나고 잎이 크면 꽃이 핌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니 참 어처구니없는 만각(晩覺)이다. 싱글생글 꽃이 피면 벌 나비 날아들고 벌 나비 날아들면 `새 생명 창조`가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 신비스러움을 사람들은 무딘 말로도, 서툰 글로도 잘 나타내지 못 한다고 그 창조주는 꾸짖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나도, 아둔한 머리로나마 짜내어 시인 흉내를 내고 싶어도 꾸짖음을 당하는 그 가름에 머물 수밖에 없음이 부끄럽기도 했다.
이 세상 생명체들은 음과 양이 있다. 그 시원은 어디였으며 그 음양 다음에는 누가 낸지도 모르는 생식(生殖)이 꼭 있었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그것도 꼭 유성, 무성으로 나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미국 생활용품 제조업체는 여성 전용을 의미하는 표식(♀)을 없애기도 했다니,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도 같은데 알 수도 없으니 궁금증만 더했다.
꽃은 자화수정 타화수정이 있는데 곧장 입만 열면 네안데르탈인의 후예이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그 `한 부류`는 왜 꼭 타화수정이어야 하는가. 산이거나 들이거나 나고 자라면 꽃을 피우고 꽃을 피우면 온갖 교태를 부려 벌 나비 날아들길 목마르게 기다렸지만, 끝내 눈물 흘리며 시들어버린 암꽃을 어찌 눈을 뜨고 봐야 하는가. 단풍은 길바닥에 떨어져도, 발길에 밟혀도 곱다는데 꽃은 시들면 왜 그게 끝인가.
그래도 아침저녁 돌보게 하여 내게 즐거움을 주는 식솔이 됐으니 잡다한 세상사에서 때로는 힐링도 되고, 어쩌면 아내보다 더 소중(?)한 존재를 정녕 외면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암꽃만 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른바 이율배반이었다. 자기모순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제 역할 다 못 하고 시름 끝에 고개 푹 숙이고 울음을 토하며 시들어버린 암꽃을 외면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아예 흔적도 없이 잘라버리기 일쑤였다. 그 암꽃을 보는 것이 내겐 고문이기 때문이었다.
꽃이 싫어, 암꽃은 더 싫어! 기다리고 기다려도 돌아보는 `씨눈`이 없어 `잉태`도 못해 말라비틀어진 그 형해(形骸)의 애잔함은 입에 올리기조차도 싫지만 자꾸 떠올리게 되니 더욱 가슴을 후벼 판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