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거족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선언하는 만세운동은 자유와 신념에 기초한 위대한 운동이었던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려고 한다. 첫째로, 3·1운동은 자유를 찾는 양심과 도의의 운동이었다. 독립선언서 첫머리에 "우리나라는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은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고 독립과 자유를 선포했다. "무력의 시대는 지나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도의의 시대에 양심과 진리에 입각하여 독립과 자유를 선언하고 외쳤다. "양심이 우리와 공존하고 진리가 우리와 함께 있도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이 고귀한 자유를 이 도의에 입각하여 누려야 한다고 그 첫머리에서 강조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총장이었던 백낙준 박사는 3·1 정신 가운데는 네 가지 기본적인 자유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①생존을 위한 경제적인 자유. ②심령적 발전을 위한 사상적 자유. ③민족의 번영을 위한 정신적인 자유. ④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한 모든 불안과 위험과 공포로부터의 자유인데 이 자유 정신으로 무력이나 폭력을 사용함이 없이 맨주먹으로 정의를 앞세우고 정의의 힘으로 싸운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 민족은 3·1운동을 통해서 정신적·문화적·사상적인 기초위에 선 도덕 군자의 민족으로 평가 받았다. 민족적 증오심이나 배타적 감정을 누르고 다만 자유정신을 발휘하여 비폭력적 방법으로 진리와 도의를 존중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위대한 민족임을 만방에 증거하게 된 것이다. 둘째로, 3·1운동은 자유를 위하여 고난에 참여하는 풀뿌리 운동이요, 이름없이 묻혀있던 씨알들의 운동이었다. 외부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원을 받아서 일으킨 혁명운동이 아니다. 소수 엘리트에 의해서 조직되고 지도된 혁명이 아니었다. 묻혀있던 풀뿌리들이 씨알들이 하나같이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고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내가 먼저 죽기 위해 앞장섰던 애국운동이요 백성이 주도하는 운동이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가 없었다. 빈부귀천의 구별도 없었다. 교육의 유무도 가리지 않았다. 전민족이 거족적으로 일어나서 오직 한 가지 목표 자유와 독립을 위해 불타는 마음으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다투어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과 경찰의 총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돌진했다. 그들 중에는 중학교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목이 터지라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평로를 행진하고 있을 때, 일본 기자들이 사옥 2층에서 사진을 찍으며 기사 취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사장인 가토가 외쳤다. "너희들 빨리 내려와 저 민족의 숭고하고 엄숙한, 저 위대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라!" 그가 보기에도 얼마나 감격적이었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당시 중국 상하이 `대륙보`의 외신기자 타이포는 이런 글을 썼다. "일본 헌병과 경찰이 아무리 총칼로 쏘고 무찔러도 조선인들은 돌 하나 던지지 않았다. 남녀 학생들이 총칼 앞에 가슴을 내밀며 태극기를 흔들고 돌진했다. 왜경과 왜병은 피에 굶주린 호랑이처럼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뛰어다니면서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르고 발길로 차서 수많은 조선인을 죽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더 한층 맹렬하게 만세를 불렀다. 아, 대한민국 만세!" 오늘 우리가 독립 국가 국민으로서 자유를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3·1운동 때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목숨바쳐 싸웠던 풀뿌리들과 씨알들이 흘린 피를 고귀하게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 대가로 주신 선물이다. 셋째로, 3·1운동은 자유와 정의의 승리를 믿는 신앙운동이었다. 맥킨저라는 사람이 `한국의 자유투쟁`이라는 글에서 말했다. "1919년 가장 놀라운 사건은 한국인이 맨주먹으로 일본 사람과 싸운 것이다. 일본 사람이야말로 야만인이요, 한국 사람이야말로 문화인임을 세계만방에 증명했다." 한국인이 무엇을 믿고 맨주먹으로 총칼로 무장한 일본인을 대항해서 싸울 수 있었던가? 8척 장신 골리앗을 대항해서 싸운 다윗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 바탕이 된 것이다. 일본 경찰이 남강 이승훈 선생을 체포해서 심문했다. "이 독립만세 운동 누가 시켜서 했나?" 남강 선생은 당당하게 말했다. "하나님이 시켜서 했다. 그것뿐이다." 3·1운동은 민족구원의 신앙운동이었다. 그래서 맨주먹으로 할 수 있었다. 우리 3·1운동의 비폭력 저항투쟁은 한국 민족사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의 현대사회로의 전환점이 된 5·4운동 발발의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필리핀의 1919년 여름에 있었던 독립 시위운동과 인도 독립의 아버지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에도 영향을 끼친 바 컸다. 그래서 간디의 스승이었던 시성 타골은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등불의 하나였던 조선인/……나의 마음의 조국 조선이여/깨어나소서!"라고 읊었다. 101년 전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피흘리고 목숨 바친 선열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당당하고 엄숙하게 선포한 독립선언문의 의미를 현재의 상황에 재해석하면서, 이기주의와 대립과 힘의 남용과 퇴폐적인 생각을 물리치고, 고난 당하는 형제와 함께 아파하고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며 무너진 도덕을 재무장하고 분단된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일에 앞장서자.
최종편집:2024-05-16 오후 04:01:15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유튜브페이스북포스트인스타제보
PDF 지면보기
오늘 주간 월간
출향인소식
제호 : 성주신문주소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3길 15 사업자등록번호 : 510-81-11658 등록(발행)일자 : 2002년 1월 4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성고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45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최성고e-mail : sjnews1@naver.com
Tel : 054-933-5675 팩스 : 054-933-3161
Copyright 성주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