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나라의 최초수도인 심양의 어제와 오늘, ①장춘에서 열리는 중국율사 장강연맹(中國律師 長江聯盟) 회의에 참석키위해 8.27부터 2박 3일간 심양을 경유해서 장춘 여행길에 올랐다. 북부지방 심양에서 발원한 만주족 루누하치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본격적으로 중원(中原)을 공략했다. 그때서야 만주인도 만주 땅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영역으로 빨려 들어갔으며, 그전까지 산해관 너머 땅은 중국 한족 땅이 아니었다. 만주족은 자신들의 발상지를 보호하고, 한족이 자신들의 왕조를 파괴하면 후퇴할 장소로 남겨놓기 위해 1860년대까지 만주지역에 한족이 살지 못하도록 봉금령(封禁令)을 내렸으나, 봉금령이 풀린 후 1897년경에는 인구가 700만 명으로 늘어났다. 1921년 신해혁명으로 자금성에서 쫓겨난 만주족이 다시 그들의 고향 만주로 돌아가려 했을 때 그들의 고향엔 한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시 돌아온 만주족은 일제와 협력해 만주국을 세웠지만 스스로 나라를 경영할 능력이 없었던 마지막 황제 부의와 그의 추종자들은 결국 일제의 대륙침략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②심양은 동북 지방의 중심지이고 광활한 만주벌판을 끼고 흐르는 랴오허강 유역에 위치하여 동북부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다. 변방에 위치하다보니 역사적으로 수많은 나라들이 쟁탈전을 벌였다. 19C말 남진 정책 펼친 러시아, 만주공략을 위해 진출한 일본의 각축장이 되어 러·일 전쟁이 일어났고 청의 멸망 후 동북 3성은 지방군벌의 재배 하에 들어갔는데 그중 유명한 인물은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으로 서안사변을 일으켜 국민당의 장개석을 인질로 삼고 공산당 주은래와 협상을 벌려 대 일본 참전을 위한 국공합작을 이끌어 낸 적이 있다. 1932년 일본에 의해 장춘을 수도로 만주국이 건국되어 도시 이름이 봉천으로 바뀌고 만주철도와 대규모 중공업 시설이 들어서면서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로 되었다. ③최근에 요녕성의 본계현 주변 씨족마을 2000명의 한족과 만주족이 집단으로, 호적에 자신들을 조선족으로 바꾸어 달라고 탄원을 한적이 있는데 공교롭게 모두 박(朴)씨들이고 17C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서 끌려온 후손이라 주장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백년 동안 숨겨둔 족보를 제출하고, 그동안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우리말과 풍속은 잊었지만 후손들에게는 자신들이 조선에서 왔다는 것을 가르쳐 왔다고 한다. ④심양을 포함한 동북3성은 고대때 부터 우리 조상들이 활동하던 곳이고 일제시대 항일투쟁의 주무대였다. 병자호란 때의 삼학사와 독립 운동가들의 무대였던 이 땅에서 지금은 성공을 꿈꾸는 조선족들과 한국의 사업가들이 모여들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2. 심양 고궁방문 및 북한음식점에서 만찬 ①오후4시경 공항에 도착하니 심양 대표부의 직원들과 심양에 사는 친구 원익이와 서울서 출장 온 병찬이가 나와 있기에, 예정대로 장춘으로 일행과 함께 바로 가느냐 아니면 혼자 남아서 친구들과 지내다가 밤에 가느냐 망설이다가, 평소에 만나지도 못한 친구 2명이나 두고 바로 헤어진다는 것이 도리가 아닌 것 같아 같이 온 일행과는 헤어졌다. ②고궁에 전화해 보니 5시30분까지 입장이 된다기에 서둘러 출발을 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이 북경으로 천도하기 전 건설한 도시가 심양이고 황제가 거처한 곳이 고궁이다. 무력으로 용맹을 떨치던 만주족이 처음으로 궁다운 궁을 지은 것인데 오래 돼서 그런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실용적이고 짜임새가 있었다. 베이징의 자금성보다는 규모가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 당시에 이런 정도의 건축물을 지었다는 것도 대단해 보였다. 싸움터에서 사용한 각종 깃발과 무기종류 등이 보관되어 있었고 유물전시관에는 당시에 외국에서 선물 받은 각종 시계 등과 청나라의 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각종 도자기의 색깔은 물론이고 기발한 모양 등을 보는 것 만해도 즐거웠다. 특이한 것은 황제의 집무실 뒤쪽에 황제가 기도를 올리는 공간이 있었는데 입구 왼쪽에 경건하게 신발을 벗고 올라가서 마음을 가다듬도록한 공간이 있었고 음식을 즉석에서 마련해서 상에 올렸는지 솥도 두 개나 걸려있었다. 그 앞쪽에는 여러 개의 후궁들을 위한 침실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는데 안쪽에는 침상과 애기를 위해 메달아 놓은 요람이 있었다. 하루 밤을 어느 후궁과 함께 보낼지 한마당 안에 여러 채의 후궁침실을 둔 황제가 많이 망설이지는 않았을까? 한편 황제를 자기 침실에 끌어들이기 위해 후궁들이 곱게 단장해서 그것도 서로의 침실을 마주보고 있으면서 경쟁을 벌였던 마음은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의 정문 오른쪽에는 전쟁터로 출정하는 장수와 병사들을 접견 하던 장소도 있었다는데 사진기를 안 가지고 온 것이 아쉬웠다. ③고궁을 나와서 한국인 거리인 서탑거리 뒤편에 있는 친구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규모도 크고 현지에서 한국 씨름 협회 전무로 활동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저녁은 새로 개업한 북한식당에 들렀는데 지난번에 가본 모란각 아가씨과 달리 나이가 어리고 북한에서 온지 3달이 채 되지 않아서 아주 순박했고 키가 모두 조그마하고 얼굴이 귀여운 사람들이었다. 북한 노래 휘파람 등을 듣고 박수 치고 놀다가 원익이가 여러번 아가씨들을 불러서 다정한 포즈로 사진을 찍게 했다. 2차를 가자기에 친구 사무실에 다시 가서 차나 한잔하며 이야기하자고 했는데 노래방으로 가다가 도중에 술집으로 가게 되었다. 1. 2층은 음식점, 3층이 술집이었는데 그 시설이 한국보다 더 호화스러웠다. 밤 기차로 장춘까지 가야되는 사람은 걱정이 앞서서 그만 가자고 하는데 모두 일어서질 않고, 이제 와서는 밤에 혼자 장춘까지 가는 것이 걱정이 되니 자고 아침 일찍 가라고 하기에, 빨리 계산을 할려고 하니 친구가 극구 계산을 했다. 택시 타고 갈려는데 조선족 사업가 최림씨가 극구 운전해준다면서 음주 운전을 해서 심양 북역에 12가 넘어서 도착했다. 3. 0시24분발 침대차로 장춘으로 가다. ①친구가 부탁한 중국인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했다. 안내원을 따라 출구를 나서니 워낙 큰 역이고 동북지방의 교통분기점이라서 너무 많은 플랫포옴이 있었고 푯말이나 안내원이 없어서 그 중국인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도저히 어디로 나가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4인실 침대 칸을 찾아가니 복도에서 아주머니 안내원이 앉아 있었고 다행이 다른 사람이 없어서 장춘까지 혼자서 가게 되었다. 만주족의 발상지인 심양의 밤이 깊은 0시24분침대차에 몸을 실었고, 밤새 남만주 벌판을 거쳐 길림성의 장춘에 도착할 것이고 거기를 지나면 고구려의 수도 지안도 나오고 백두산도 나올 것이다. 밤이라서 만주벌판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으나 도착 전에 깨워준다는 확약을 받고 서둘러 잠을 청했다. ②4시 조금 전에 깨워주기에 일어나 보니 비가 오고 있었고 장춘역에 내리니 높은 계단에 가방을 끌 수 있는 통로도 없어서 들고 올라가 출구에 나서니 택시 손님 유인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단번에 알수 있는지 한국이냐고 묻기에 길림성 정치 협상 위원회내의 동심 호텔로 가자고 하니 예상보다 비싼 20원을 달라고 했고, 차안에는 이미 합승 손님들이 3명이나 있었다. 도착했다고 내려라 해서 보니 동심호텔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입구에 불이 꺼져 있어서, 당신이 내려서 더 한번 알아보라고 했더니 기사가 내려서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고, 주위를 돌다가 어디로 전화하더니 한 블럭을 더가니 큰 대문에 경비가 서있었고 문을 열어 주었다. 기사 말만 믿고 혼자서 내렸으면 날이 샐 때까지 혼자서 고생했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4. 오전 회의 참관 및 오찬 ①아침에 일어나 뷔페 식당으로 가니 지금까지 먹어본 중국 음식 중에서 가장 우리 입에 맞는 음식이라서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주최측인 장춘 소재 대화명인 율사사무소 조선족 율사인 신의섭씨와 인사를 나누고, 코트라 홍콩 지사장을 지냈다는 안경준씨를 만났는데 나이가 70이 다되었고 외국어대 중국어학과 1회 졸업해서 현재는 홍콩에서 20년 이상 거주해 오면서, 홍콩법률 사무소의 중국광동 소재 국제 투자 사무소를 책임지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에 관련 책을 두 권이나 저술한 최초의 중국전문가였고, 일본어는 물론 러시아어까지 능통했는데 아들 3명이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부인은 아들집에 가 있는 경우가 많아서 1년에 6개월이상을 혼자 지낸다고 했다. 우리나라 담배인삼공사의 "정관장"이라는 상표를 중국과 다투어 지켜낸 것이 자기 사무소의 성과 였다고 했다. ②오전 9시30분에 시작된 회의가 북경시 율사협회 회장 장칭, 길림 법대학교수, 전국 율사협회회장, 길림성 인민대표 상무위원회 부주임등 공식 인사말만 15명이나 하다보니 오전이 다 흘러갔다. 몇 년 전에 대만에 갔을 때와 같이 계속해서 축사가 이어지고 사회자는 다시 한번 축사자의 업적을 나열하면서 박수를 유도했다. ③식이 끝나고 명함교환 시간이 있어서 북경율사협회장 등과 명함을 교환하고 홍콩에서 안경준씨와 같이 근무하는 오소웅 변호사를 찾아가서 언제나 웃음을 띄는 얼굴이 보기 좋다고 칭찬해 주니 기분 좋아했다. 러사아의 알렉산드로 변호사는 연해주에서 "36시간"이라는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한국인 상대를 많이 하는지 명함이 아예 한글로 되어 있었다. ④12시30분에 시작된 오찬은 뷔페식이 아니고 테이블에 각종 요리가 계속 나왔는데 밥은 먹지 않고 조금씩 맛보면서 느긋하게 즐겼다. 교포사회의 한글 신문사에서 2명의 기자가 나와서 동석하게 되었고 어제 저녁에 우리 일행들과 늦게까지 폭음을 했다는 조선족 신의섭 율사는 중국의 50여 소수 민족 중에 자기 나라를 갖고 있는 사람은 조선족뿐이라서 지금도 공안에서 조사가 나오며 동생들이 모두 공산단원이지만 자신은 절대로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고 있고 제일 부패하고 비능률적인 것이 공산당이라면서, 공산당을 비난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가 없는 자신의 의견 발표일 뿐이라면서 처벌되지 않는다면서 공산당 비판을 했다. 자신은 숨기는 것이 없는 화끈한 성격을 좋아하고 일단 술로 전쟁을 하고 난 후에 평화를 추구한다면서 무리하게 술을 권했다. 어제 저녁에 같이 폭음한 송철호 변호사를 보고는 "활약분자"라하고, 술을 못하는 류두현 변호사와 필자를 보고는 "지식분자"라고 지칭 하길래, 오전에 본 중국 신문에 러시아의 여객기 폭파사건을 "공포분자"의 소행으로 본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⑤숙소로 돌아와서 중국용정에 사는 선배로부터 소개받아서 한국에서 전화로 인사를 나눈적이 있는 조선족여자 율사인 이인복씨와 남자 율사 윤영길씨와 통화를 하니 언제라도 숙소로 찾아 오겠다하여 이인복씨와는 3시에 로비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인복씨의 남편이 이인복씨 사무실을 구경시켜준다면서 찾아왔기에 우선 마지막 황제 부의가 만주국의 황제로 근무한 만주국 청사를 보고 나서 사무실 방문을 하기로 했다. 오후회의 내용은 주식 상장과 기업인수 합병이었는데 김제섭씨가 대표로 참석키로했다. 5. 만주국 청사 관람 및 법률사무소 방문. ①만주국은 일본이 대륙침략의 방편으로 청이 멸망 후 탠진에 있던 마지막 황제 부의를 장춘에 데리고 와서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 나라를 세운 것이다. 만주족의 고향인 심양을 수도로 정하지 않은 것은 심양은 청나라의 옛 수도로 도착 만주족의 반란이 무서워서 장춘을 수도로 만주국을 세운 것이라 한다. ②제일 먼저 지은 건물은 초라한 2층 구조 였는데 1층 첫 전시실에는 부의가 거느린 4명의 부인들과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1층에는 후처들의 침실과 거실이 2층에는 부의의 집무실과 본처인 황후의 거처가 있었는데 부의가 처음부터 애정을 두지 않고 지내니 외로운 나머지 마지막에는 아편 중독자가 되었다는데 침대에 누워서 시종이 불붙여주는 아편을 피우고 있는 모형이 있었다. 심양의 고궁에도 후궁 침실을 좌우에 배치하더니 허수아비 황제로 있으면서도 똑같은 행세를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의는 자금성내에서 환관들의 거세(去勢)장면을 보고 흉내내다가 성불구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어쨌던 자손 없이 부인을 4명이나 거느렸고, 두 번째 부인이 중국 역사상 황제와 이혼한 첫 번째 여인이었다한다. 뒤이어 지은 옆 건물에는 신하를 접견하는 장소가 큰 교실만하게 마련되었고 외국 손님접대실, 당구장, 음악 감상실 등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자금성의 규모에 비하면 비교가 안되었다. ③뒤쪽에 지은 2층 구조의 건물에는 비교적 짜임새가 있게 마련되어 있었고, 부의가 몸이 허약해서 온갖 약제를 준비해둔 의무실, 불당(佛堂), 선조 황제의 신주와 사진을 모신 봉선당(奉先堂), 관동군 사령부에서 파견된 일본관리가 사용해온 집무실 등이 있었고, 욕실에도 조그만 탁자와 의자가 있었는데, 일본군이 수도 없이 받으러 오는 결제문서에 형식적으로 결제하기가 귀찮아서 욕실에 가서 피해 있으면 거기까지 받으러 와서 욕실 탁자에서 결제한 문서가 많았다 한다. 부의의 전용 이발소에는 당시 사용한 면도칼과 옆에서 핸들을 돌리면 뒤로 제껴지는 이발용 의자 등이 있었는데, 다른 방에는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나오듯이 부의가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수의를 입고 삭발을 당하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물전시실에는 부의가 어릴 때 사용한 신발이며 욕실, 목욕기구, 장난감, 악기, 테니스 라켓, 사냥용 총 등이 있었고 부의는 영구선교사 밑에서 신식 교육을 받아서 중국에서 처음으로 테니스도 하고 골프 친사람이기도 하다. 조금이라도 더 보고 갈려고 뛰어다니면서 보았는데 부의가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사면이 되어 일개 공민이 되기까지 사진과 주은래, 모택동과 만난 사진등도 있었다. ④불과 3세에 청나라 황제에 등극한 후 자기 손으로는 옷 하나 입을줄 모르고 지내다가 폐위되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장춘으로 끌려가서 만주국의 허수아비 황제로 생활하다가 일본 패전 후 일본으로 피신중 소련군에 체포되었다가 공산당 정권하에 재판 받고 수감 중 사면된 후 식물원 정원사를 하기도 했다. 산전수전 다 격은 사람을 중국말로는 酸柑苦辣都 歷過的人(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 다 본 사람)이라고 한다. ⑤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교포 율사 이인옥씨가 기다리고 있었고 30분을 달려서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 구조가 120평에 소속변호사가 14명이고 부동산 관련업무를 특화하고 있었으며 우수변호사 사무실로 선정되었다는 상패가 놓여 있었는데, 한국의 변호사 업계는 수입이 날로 열악해지고 있는데 중국은 어떠냐고 하니 중국은 이제 법률 수요가 폭발적으로 창출되고 있어 변호사의 수입이나 대우가 날로 좋아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와 대조적이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서로 이해를 넓히고 협조하기로 약속하고 숙소로 오니 오늘 예정된 호텔만찬이 더 좋은 장소로 변경되었다면서 아시아에서 제일 큰 식당으로 간다고 했다. 식당으로 가는길에 이번회의 주최측인 대화명인 율사 사무실을 방문했다. 6. 만찬 ①차를 타고 교외를 한참 지나니 허허벌판에 큰 용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불빛간판이 나왔다. 식당 이름이 녹색 생태원 이었고 그 지역 최고의 건달이 주인인데 입구에는 한눈에 건달로 보이는 주인이 장춘시장과 악수하는 개업식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로세로 길이가 200m정도가 되는 사각형에, 기둥 없는 철 구조물로 그 안에는 큰 폭포와 동산이 있었는데 아시아가 아닌 세계 어디에도 이만한 식당은 없을 것 같은데 관리가 제대로 될지 의문이었다. ②우리 테이블에는 대련, 하얼빈 소재 중국 변호사, 대련대학교수 등이 참석해서 수없이 술잔이 오가는데 내 잔은 입에만 되고마니 늘 가득히 있어서 보기에 민망했다. 하얼인 변호사에게 한겨울에 하얼빈에도 아이스크림이 잘 팔리느냐고 하니 잘 팔리고 골프장도 있다고 했다. 앞으로 동북아 중심시대가 오고 있는데 동북아 시대의 중심 세력이 한?중?일 3국인데 여기 모인 우리들이 긴밀히 협조하자면서 여흥을 즐겼다. ③호텔에 도착 후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기에 먼저 계산하려는데 주최측 변호사가 와서 좀 할인한 덕분에 2박에 10만5천원을 주었다. 숙소에 모여서 의논하기를 무료식사와 넥타이와 와이셔츠 선물도 받고 중국의 30개 핵심법률사무소와 주변 국가들의 변호사와 교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다음에도 참석하기로 하고, 내일 아침 5시에 일어나 5시30분에 출발키로 했다. 7. 심양을 거쳐 인천으로, ①새벽 1시 가까이에 잠이 들어서 5시에 일어나 냉수를 한 병 마시고 모든 준비를 완료 후 출발했다. 오는 길에 보니 일본 관동군 사령부 였던 곳에는 일본식 누각이 남아있고 현재는 길림성 공산당위원회가 들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만주벌판의 옥수수밭을 지나서 오는데 교포기사가 시속180km까지 속력을 내기에 좀 천천히 가자고 부탁했다. ②공항에 2시간 전에 도착해서 친구 병찬이와 합류해서 인천공항 도착 후 친구 차를 타고 광명역에 오니 고맙게도 친구 부인이 차표를 예매해서 주기에 30분남은 시간에 벤치에 앉아서 여행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친구가 서울에 살고, 심양에 거주해서 만나기도 힘드는데, 심양에서 출장온 친구를 만나 회포를 풀고, 차까지 같이 타고 오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시간을 갖게되니 정말 뜻 있는 여행이었다. 빨리 여행기를 마무리해서 친구에게 주고, 북한 접대원 아가씨와 찍은 사진도 동기회 홈페이지에 올려야겠다. 2004. 8. 29. P4:13 경기도 광명시 고속철역 대기실에서
최종편집:2025-05-16 오후 01: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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