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가정에 두 아들이 있었다.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고 있던 이 가정에 갑자기 근심 거리가 생겼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에 돌아올 재산을 미리 달라고 했다. 그래서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줬다. 작은 아들은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 살면서 그만 가지고 간 재산을 다 허비하고 빈털터리가 됐다. 남의 집 머슴살이까지 하다가 끝내 아버지에게로 발길을 돌린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겼다. 살찐 송아지를 잡아 축하 잔치를 베풀었다. 누가복음에 나온 이야기다. 그가 찾아간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야말로 자녀들이 안겨야 할 영혼의 안식처이다. 자녀들이 사모할 마음의 쉼터가 바로 아버지인 것이다. 석관초등학교 장승헌 어린이가 자기 아버지를 이렇게 노래했다. "아빠 아빠! 아빠 품에 안기면 솜처럼 따뜻해요. 아빠 아빠! 아빠 등에 기대면 아무것도 두려운게 없어요. 아빠 아빠! 아빠 어깨에 앉아 보면 하늘과 바다 저 먼 우주가 다 보여요." 앞의 이야기에서 아들을 끌어당긴 것은 바로 아버지다. 생의 위기 상황 중에서 그 자녀들을 돌이키게 한 힘,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아버지는 자녀의 삶에 있어서 언제나 이와 같이 하나의 분수령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나의 삶의 전환점이 되고 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떤 아버지인가? 또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은가? 찰스 윈돌은 말한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누구도 완전하게 할 수 없는 힘든 일이다. 이 역할에 대한 안내서나 준비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시행착오의 생의 과정이며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 아버지라고 불리울 자격을 얻는 한 모델이 있다. 자녀들의 최고의 선은 아버지의 선한 사랑의 동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라는 말에 아버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한자로 어버이 친(親)자는 나무 목(木) 위에 설 립(立), 그 옆에 볼 견(見)자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란 존재는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서서 아들이 어디 있나 살펴보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전남 여도초등학교 5학년 고승경 양의 동시이다. "우리 아빠는 왜 안경을 쓰실까/ 나를 더 자세히 보려고 안경을 늘 쓰시겠지/ 우리 아빠는 왜 손이 크실까/ 내 머리 쓰다듬어 주시려고 손이 크시겠지/ 우리 아빠는 왜 등이 넓으실까/ 나를 등에 업어주시려고 등이 넓으시겠지/ 우리 아빠는 왜 키가 크실까/ 내가 어디 있나 찾으시려고 키가 크시겠지."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측은(compassion)`은 라틴어 com(함께)과 pati(아파하다)의 합성어로 `함께 아파하다`는 뜻이다. 아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는 것이다. 서울 증산초등학교 김윤권 어린이는 이렇게 썼다. "체육 시간에 걸려 넘어져 상처로 얼룩진 내 무릎. 저녁에 퇴근하신 아빠는 내 다리를 썩 보시곤 "클 때는 다 그런 거야"하시더니, 그날 밤 잠든 내 무릎에 `호오` 몇 번이나 입김을 불어주시며, "에이 고녀석 조심하지 않고서"하며 자꾸만 자꾸만 혀를 차시는 우리 아빠." 이것이 바로 측은히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자녀가 약해지지 않도록 아이가 듣는 데서는 "클 때는 다 그런 거야"하고 돌아서서는 그 까진 아이의 무릎이 자기의 아픔이 되어서 "에이 고녀석 조심하지 않고서", 혀를 끌끌 차는 아버지의 모습, 바로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먹고 우리 자녀들은 자란다. 이런 애정 속에 우리 자녀들의 인격이 성숙해 간다.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마디로 용서였다. 한마디 꾸지람 없이 오히려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긴다. 부자간의 관계가 회복된다. 아버지의 용서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다. 아버지의 용서야말로 자녀의 삶에 있어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자기 아버지가 청소부인 것이 남부끄러워 아버지를 외면했던 한 아이가 오히려 `못난 애비 탓`이라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그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겨서 쓴 글이 있다. "흿부연 새벽별이 오시면 나가시는 아버지, 이 동네 저 동네 길가를 청소하신다. 온 동네 길마다 묻어나는 아버지의 땀방울, 사랑방울. 가끔은 몸살에 감기에 쓰러지셔도 우리 사랑 약이라며 일어나신다. 컴컴한 밤길을 터벅터벅 길가에 묻어나는 발자국 발자욱마다 사랑의 정이 듬뿍 묻어난다. 길가에서 만나면 부끄러운 아버지,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길에 나의 눈물이 묻어나네. 집에 오면 아무 말 못하고 고개만 떨구는 나."괜찮다, 괜찮아." 어깨를 토닥이며 용서해주시는 아버지. "이 애비가 못나서 그렇지." 대기업 사장, 회사원은 아니어도 우리에 대한 사랑만은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아버지.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빠, 사랑해요. 오늘도 환한 웃음 웃으시며 새벽을 열고 계시는 우리 아버지." 무엇이 이 자녀로 하여금 천하고 부끄러운 아버지가 아니라 새벽을 열고 계시는 그 아버지로 승화시켜 놓았는가? 무엇이 청소부가 아닌 새벽을 깨우는 아버지로 받아들이게 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아버지의 용서였다. 멀리서 보고 달려가시는 아버지, 함께 아파하시는 아버지, 용서하시는 아버지, 내 영혼의 안식처가 되시는 아버지 우리 아버지, 내가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최종편집:2024-05-17 오후 04: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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