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는 국보 제76호이며 공께서 임진왜란 진중에서 6년 9개월간(임진년 선조 25년: 서기 1592년(48세))/ 1592년 1월 1일∼8월 27일에서 무술년(선조 31년: 서기 1598년(54세))/ 1598년 1월 1일∼11월 17일)에 걸쳐 붓으로 쓴 초서체의 진중일기로써 공의 성품이나 국정에 대한 솔직한 심정, 군사에 대한 비밀계책, 친지. 부하나 내외 요인들과 내왕한 내용, 부하들에 대한 상벌 등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임진란 당시 정치, 군사에 관한 전체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료가 된다. 학교에서는 일기를 쓰라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 신문에는 공개되는 일기는 아이들에게 정신적으로 미치는 영향 때문에 사적인 일기를 검사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으로 여론이 생겼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러면 좋은 측면에서 일기 쓰기는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이건 어른이건 우리는 쓰고자하는 살아있는 자아 표현의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다. 일기를 쓰다가보면 자신과의 영혼의 대화가 이루어져 은연중에 생긴 고민이나 불안, 또는 심리적 압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거나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일기를 쓰지 말라고 할 것인가. 일기란 열심히 쓰는 만큼 는다. 글쓰기의 기초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충무공의 일기처럼 후대에 귀중한 사료가 되기도 하고 공의 일기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정신적인 얼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은 한문과 영어만 배워서인지 한국인의 얼이 빠져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중국적을 취득해 해외로 빠져 나갈려는 사람, 국적 포기자, 군대는 안가면서 대한민국에 살려는 사람, 총은 들지 않고 감옥에 가겠다는 사람은 충무공의 일기를 수 백 번도 더 읽혀서 해외로 추방해 버려야 한다. 오십 년 떠돌이가 되어 보아야 국가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내가 소중한 만큼 국가는 더 소중하다. 국가보다 개인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것들을 가만히 두다니. 원 균을 닮은 2세들이다. 원 균을 닮은 2세들은 노란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 그래야 이완용 같은 것들이 나오지 않는다. 만약에 충무공이 그 날 그 시간에 없었더라면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왜군을 그 어느 누가 물리칠 수 있었는가? 임금이란 것은 피난이나 가고, 육지는 쑥대밭이고, 왜군은 진주를 뺏어 장기전에 대비해 진지 구축을 했고.... (1592년 4월 14일- 일본 제1군(고니시 유키나가): 1만8천7백명-부산도착, 일본 제7군(모리 데리모토): 3만명--부산도착, 제2군/3군/4군/5군/6군--->총 15만8천7백명 침공) 조선은 풍전등화인데……. 그 때 조선에도 훌륭한 사람들은 있었다. 이 이의 십만양병설은 유비무환의 정신적 자세 또는 국가를 위해 미리 대비하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갈라진 파(서인 동인, 남인 북인)들이 전쟁을 부르고 전쟁을 오래가게 한 원인이다(말의 무서움). 그 전쟁통에도 여자를 밝히는 족속도 있고 공을 자신에게 돌리려고 거짓 장계를 올려 결국은 충무공을 감옥에 보내고 사형언도까지 받게 한 인간도 있으니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이다. 충무공은 뭣 때문에 백의종군하였을까?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그러던 중 82세의 노모가 돌아가시자 공은 통곡을 한다. 죽음도 지켜드리지 못했다. 아들 면도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의 일기를 보면서 일기 속에 충무공의 마음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조국이 원하면 한 치의 오차 없이 그 부름에 응답했고 같은 처지에 있는 군졸에게는 따뜻하고 배려심이 있는 리더로, 노모께는 수시로 안부를 확인하는 효자로 공과 사를 구별해 공무를 보았다. 얼마만큼 충실한가는 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보통 사람이면 그거 귀찮아서 쓰지 않는다. 그러나 약 7년간의 기록을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위대하다는 것이다. 하나를 보면 백을 알 수 있다. 철두철미한 성격이고, 믿음직하고 늠름한 장군이다. 직책이 사람을 만든 것일까? 어머니가 충무공을 만든 것일까? “12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하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으로 탄식하지는 아니하셨다." 이것을 보아도 공의 어머니는 훌륭하셨다. 훌륭한 사람으로 키울 줄 아는 분이다. 공의 어머니 가치관은 자식의 안위보다 국가를 먼저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중일기를 읽고 나니 나도 충무공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아 국가의 부름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국가가 뭘 해주길 바랄 것인가,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 원 균과 이순신의 가상 인터뷰 원균과의 인터뷰 1. 일인이 모함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여 충무공이 잡혀가게 되었는데 그 때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원균: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들어가서 나도 공을 세워 큰상을 받고 싶었습니다 2.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않습니까? 원균: 내가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이순신이 잡혀가게 하지도 않았겠지요. 평소에 나를 싫어하길래 나도 이순신이 미웠습니다. 재물을 많이 챙길려니까 이순신이 눈에 가시였습니다. 3.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되고 난 뒤 칠천량 해상 전에서 무참하게 깨어졌는데 책임자로서 책임을 느낍니까? (충무공이 붙잡혀가면서 원 균에게 직위를 인계할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비축해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약 1만석이 있었으며 화약은 4천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 말고도 3백 자루나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옥에서 풀려나 다시 통제사가 되어 내려온 이순신에게는 모든 것이 소실되어버리고 고작 군사 1백20인과 병선 12척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원균: 이순신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싸움에는 역시 뛰어난 지략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죽음 앞에 서니 이순신의 충이 보입니다. 그에 비해 나는 내 일신의 영광만을 너무 생각해 이순신을 빨리 없애버리고 싶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순신과의 인터뷰 1.꼼짝없이 모함에 걸려 든 기분이 어떻습니까? 이순신: 선이란 하늘이 알고 땅만 아는 것이지 인간은 다 알 수 없는 어두운 눈을 가졌습니다. 판단력이란 말의 힘에 따라 흐려질 수도 있습니다. 2.죄도 없는데 순순히 잡혀가셨습니까? 이순신: 사람의 일이란 미리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죄가 없다면 언젠가는 밝혀지겠지요 3.그 때는 국가도 지위도 모두 싫지 않으셨습니까? 이순신: 싫고 좋고가 어디 있습니까. 운명이라면 이 땅이 나를 키웠고, 이 강산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 사실 아닌가요.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진실이 이깁니다. #.생각 열기 1. 원 균의 가치관을 말해 봅시다 2. 충무공의 가치관을 말해 봅시다 3. 두 사람의 가치관을 비교 분석해 봅시다 #.배경 지식 넓히기 1.16세기 일본의 시대상에 대해 알아봅시다. 2.조선시대 관직에 대해서도 알아봅시다.
최종편집:2025-05-16 오후 01: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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