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숲이 주는 푸근함을 잊고 산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근대로 내려오면서 숲은 파괴되어지고 깎이고 잘리는 운명을 맞았다. 그것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행하여지는 무분별한 개발에 드리워진 그림자이다.
개발이냐 보존이냐 하는 사회문제로 발전되었다. 그런 자연과 인간과의 공존문제로 대두되는 것이 환경문제이다. 사람들은 어디까지 자연을 보호할 수 있고 자연은 사람들을 얼마만큼 파괴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의 영화가 모노노케 히메이다.
중세 일본의 무로마치시대(1338∼1572년) 그러니까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 쯤 되었을 시기이다. 시대적 생활상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의 대표적인 것으로 화승총(조총)이 나온다.
이 이야기는 북쪽의 에미시족 마을에 멧돼지 모습을 한 재앙신이 온다. 그 재앙신을 에미시족의 후계자로 지명된 에시타카(푸른 옷)가 재앙신을 죽이자 재앙신의 저주를 받아 왼팔에 상처를 입는다. 그 상처는 저주를 받은 상처이기 때문에 죽음 외에는 풀 길이 없다.
그래서 아시타카는 저주를 풀기위해 서쪽으로 떠난다. 타타라 마을에 도착한 아시타카. 그 마을은 에보시가 사철을 캐내 팔아서 살아가는 소외된 자들의 공동체 마을이다. 팔려가는 여자와 나병환자들을 데려와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면서 같이 산다. 에보시는 (붉은 옷) 여걸 중에서도 카리스마가 있는 여자 전사이다. 그 마을에 늑대의 신 모로가 나타난다. 모로의 등에는 원령공주가 붙어 있다.
에보시를 철천지 원수같이 생각하는 산(월령공주는 흰옷)이 에보시를 죽이려다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을 때 아시타카가 구해 데려나오다 아시타카는 총을 맞고 겨우 빠져나온다. 산은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아 늑대의 신 모로가 엄마이다. 인간을 싫어하는 산은 아시타카를 죽이려다 살려서 숲으로 데려다 치료를 해본다. 그러나 아시타카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 때 생과 사를 관장하는 사슴신(시시신)이 나와 아시타카에게 생명을 주자 서서히 살아난다.
아시타카는 신의 세계에 들어온 것이다. 산도 사슴신이 살려주었기 때문에 아시타카를 살려준다면서 그에게 먹을 것을 준다. 산, 숲/ 에보시 제철소/ 에미시 마을의 공간구도와 시간은 과거이고 동물신/아시타카 미시적 갈등구조로 되어 있다. 아시타카와 원령공주와의 이해소통을 중재자로 한다.
엄연히 존재하는 신의 세계와 사슴신이 살고 있는 숲, 멧돼지 신 옷코토누시, 늑대신 모로 가족과 문명의 충돌이 일어난다. 자연을 파괴해 철을 생산하려는 에보시는 강력한 자연 파괴자이다. 마을도 산도 황폐하게 변했다. 그러나 사슴신도 두렵지 않은 철의 여인, 자연과 문명간의 충돌을 피해보려고 하는 아시타카, 이 편도 저편도 아닌 아시타카는 둘에게 미움도 받지만 도움도 준다. 즉 진실한 눈으로 보기위해 길을 떠났듯이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길은 너무나 험하다. 그러나 위험도 피하지 않고 수용하는 자세로 문명과 자연과의 충돌을 지켜본다. 결국 에보시는 가공할 무기인 화승총으로 사슴신을 쏜다. 신을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다면서.
사슴신의 밤의 모습은 투명한 젤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시시신(사슴신)의 목이 떨어지면서 재앙이 내린다. 나무는 죽고 마을은 불타고, 살아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무서운 저주는 계속된다. 지코바는 시시신의 목을 가지고 달아나지만, 목은 몸을 부른다. 아시타카가 목을 돌려주라고 하자 시시신의 목을 내놓는다. 목은 다시 붙고 저주는 차츰 줄어든다.
호되게 맞은 에보시도 한쪽 팔을 잃고 살아 돌아온다. 산과 아시타카는 시시신이 돌아가는 곳을 보고 팔의 저주도 풀린다. 황폐해진 자연에서 새싹이 돋고 풀들이 자라나 자연은 예전의 모습을 서서히 되찾는다. 인간들은 살아남았으니까 되었다고 다시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자고 한다.
우리는 신을 상징하는 숲을 파괴하고는 살 수 없다. 그 곳에서 나고 그 곳으로 돌아 가야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이 가만히만 둔다면 아무런 문제도 피해도 주지 않을 것이다.
자연 파괴로 홍수다 산사태다 지진이다 하지만 자연은 그저 우리들에게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한 존재이다. 그런 자연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파괴하고 있으니 그것은 안 될 일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만큼 우리들에게는 혹독한 시련이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과의 공존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아시타카의 눈으로 확인한 진실만이 우리가 확인하는 공존의 세계이다. 숲과 인간, 인간과 숲과의 화해의 모색이 있어야만 인간은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감독은 보여주지만 판단과 대안은 우리가 찾아야한다. 이 영화의 한 장면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사슴신의 온화한 얼굴이….
#. 멧돼지 신은 무엇을 상징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