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도 더 전 나는 수륜고등공민학교(현 수륜중학교)에 입학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그 고공교만 해도 오늘의 대학생 되는 것만큼이나 가슴 설레던(?) 일이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그 학교 졸업은커녕 1년 여 다니다 예고도 없이, 그때 한 책상을 썼던 `절친 정영(鄭永)`과 뿔뿔이 헤어졌다. 그 후 30여 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성주신문 기고문을 보고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죽마고우라더니 얼마나 반가운지 한참 얘기 주고받다가, 그때 했던 김삿갓 얘기부터 하는 것이다. 나는 기억이 흐릿했지만 그 절친은 그대로 복기를 하는 것에 더욱 놀랐다.  너무 반가움에 한 번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서너 번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추억의 고공교 시절 얘기도 하고, 때로는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그러다 조금 숙연(肅然)한 분위기가 되며 무거운 얘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실 내 자식 하나가 훈련 중 물에 빠진 소대원 2명을 구하고 순직했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랐다. 청천의 벽력이었다. 잠시 가라앉은 침묵이 흐르다가 내가 위로도 하고 분위기를 반전하려 다시 조용히 물었다.  서울고를 거쳐 단국대학교 1989년 육군중앙군사학교(ROTC) 소위(27기)로 임관 복무 중일 때, 강원도 고성 북청강에서 팀스피리트 한미 합동훈련이 있었다. 그때 도강하던 두 병사가 강 한복판의 급류에 휩쓸리고 있었지만 모두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를 본 내 아들(정재훈 소위)이 바로 뛰어들어, 자기 소대원도 아닌 두 병사를 구하고 내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 했다고, 밝고 담담한 표정으로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1990년 3월 16일. 처음 그 비보를 접했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제는 그 참사가 있은 지 30여 년도 더 지났으니 비감(悲感)함보다는 오히려 내 자식이 자랑스럽다고 하며, 가벼운 미소도 실었다. `살신성인 정신과 참된 부하 사랑의 표상`이었다는 친구의 그 대범(大凡)함에 내가 외려 의기가 소침해지고 말았다.  청천벽력 같은 비보에 부인과 함께 그 부대(22사단)로 달려갔지만 그 황망(慌忙)함을 가눌 길도 없었다. 사단장과 온 부대원들의 통곡과 비통해함에 위로는 받았지만 캄캄한 하늘은 이겨 내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러나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정 중위 아버지가 한 말은 `꼭꼭 묻어 놓고`였다]해 놓고 보니 그나마도 공허(空虛)해버린 내(아버지) 가슴을 그 만분의 일이라도 채워지기는 했다며,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했다. 겉으로는 `꼭꼭 묻어 놓고···`를 토해냈을 것이겠지만, 속으로는 휘몰아쳤을 그 폭풍우를 어떻게 이겨냈을까를 생각하니 내가 울컥해지며 순간적 격(激)함이 나를 요동치게 했다.  아! 상상만으로도 아버지로서의 가슴은 분명 `천 갈래 만 갈래`였을 것임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았다. 거룩하고 고결한 정재훈 중위의 희생정신을 그 무엇으로도, 그 어디에도 견줄 수나 있으리오만, 그러나 내 가슴 한 구석은 "오호! 정재훈 중위가···!"라는 비통함으로 에는 가슴 가눌 길이 없었다. 아, 아! 사병 2명을 구하고 순직한 공적이 `보국훈장 광복장`이라 함에 한없이 허허로움만 밀려왔다. 겨우 `광복장` 하나가 숭고한 희생과 치환(置換)이 됨에 몹시 야속도 했다. 명구(名句),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주라"가 자꾸 떠오르니, 이 소인배의 미욱함을 영령이시여 용서하소서!  1주기 그 기일(忌日)부터 부인과 함께 매년 사단 추모 행사에 참여했다. 추모 행사는 그 사단뿐만이 아니었다. 1990년 6월 6일 현충일에 모교 교정에 동상 건립을 시작으로 사단 신병교육대에 그 이름을 딴 `재훈기념관`과 `재훈체육관`의 설립, 충북 괴산 소재 학훈단의 동상 건립이 있었으며 특히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율곡과 신사임당의 인성(人性) 교육관`은 정재훈 중위의 "숭고한 살신성인 정신과 부하 사랑의 전범(典範)"의 결정판이리라! 아무나 결행할 수 없는 그 인성과 품성에 절로 고개가 숙여짐을 어쩌지 못 한다.  그날 그 소주잔 기울이던 날로 다시 돌아간다. 아래 두 동생을 건사하는 일로부터, 나와 아내가 생업 때문에 미쳐 아이들 돌보지 못할 때는 재훈이가 나섰으며, 소소한 가정사도 모두 재훈이 몫이라 했다. 중고교 시절에는 저보다 어려운 친구부터 먼저 챙겼으며, 길가다 `동전그릇`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고 내게 들려준 얘기도 있었다.  내 절친 정영은 중학교 때 공납금도 제때 내지 못해 퇴학당한 일도 있었으며 그 어린 나이에 살 길 찾아든 곳이 서울 광장시장 포목상가였다. 얼마나 열심히 살았던지 그때 그 시장의 점포 서넛을 운영했다니 이재(理財)의 수완을 엿보게 한다. 상당한 기반을 잡고 나서는 상주(商主) 불교신자들의 모임인 `무주상원심회`를 이끌었으며, 회원들의 혼사에서는 주례 봉사도 수행했다. 그러나 한 번도 사례의 소품을 받은 일도 없었으며, 어쩌다 본인도 모르게 성심(誠心)을 받았다가 도로 돌려줬다는 일도 다반사였다. 역시 멸사봉공의 정신은 부자(父子)가 다르지 않았다.  절친의 정영! 앞으로 우리 자주 만나 그 어렵던 고공교 시절의 정회(情懷)를 더 나누며 두터운 우정을 쌓아보자꾸나. 어쩌면 그것이 정재훈 중위의 그 고결한 희생정신을 추모하는 길이 될 것이며, 그것이 영면으로 승화되는 가교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그게 바로 정영 친구의 독실한 불심(佛心) 정화(精華)의 표상이 되길 합장(合掌) 기원하노라.
최종편집:2025-06-16 오후 06: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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