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7월 10일. 8사단 21연대. 대구 근교 화원에서 부대를 재편성해서 다시 제천·평창·홍천을 거쳐 여기 인제 양승리로 이동했다. 여기 와서는 행정 업무 외에 또 한 가지 일이 생겼다. 전선에 포탄을 운반하는 일이다.  오늘도 포탄 운반 사역에 차출되어 80mm 박격포 포탄 5개를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 맨몸으로 오르기에도 힘든 험산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르고 있는데 갑자기 정지 명령이 내렸다. 미군이 부상병을 들것에 눕혀 들고 내려오다가 우리에게 그것을 산 밑까지 들고 내려가 달라는 것이다. 우리 측의 인솔 장교는 대위이고, 미군의 책임자는 중위인데도 우리가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기분이 몹시 상했지만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1년 8월. 지금 UN군과 인민군 사이에 정전회담이 진행 중이다. 우리로서는 무엇보다도 반가운 소식이다. 요즘 우리끼리 모이기만 하면 정전회담 이야기다. 그래서 서로의 인사가 `진행 중!`이다. 정전회담이 진행 중이니 힘내라는 뜻이다. 우리의 소원은 오직 정전!  그런데 후방에서는 대학생들이 정전을 반대하는 데모를 한다고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잡아다가 일선의 참호 속에 처박아 놓고 싶다. 아무리 욕을 해봐야 그들의 귀에 들릴 리 없고 내 입만 더러워지겠지만, 그래도 `진행 중!` 똥개야 짖어라. 그래도 기차는 달린다. 지금 한편에서는 정전회담이 진행 중이면서도 일선에서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겠다고 격렬한 하계 공세를 가하고 있다.  오늘도 연대 본부의 행정병들이 박격포 포탄 운반에 동원되어 전투 현장에 이르렀다. 그때 한창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아군이 공격하는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서 전투상황을 보았다. 먼저 미군 비행기가 적진에 무차별로 화염탄(네이팜탄) 폭격을 가했다. 온 산이 불바다가 되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살아남을 것 같지 않았다.  한참 폭격을 가한 후에 아군이 진격을 개시했다. 빠른 속도로 전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화염탄을 그렇게 퍼부어도 살아남아 저항하는 적군이 있는 것 같았다. 매양 저런식으로 전투를 한다면 박격포 같은 것은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은 무자비한 것, 여기엔 자비의 하나님도 손을 드신 듯, 핏발 서린 가인의 후예들의 무자비한 살생만이 난무하고 있다.  1951년 9월 20일. 그동안에 한 계급 올라 이동중사로 진급하고, 연대는 양구 벽산으로 이동했다. 넓은 들판에 연대 본부 진을 쳤다. 미군 부대도 가까이 자리잡고 있었다. 전방에서는 아직도 하계 공세가 그대로 계속되고 있는데도, 50리 떨어진 이곳 후방은 아주 평온해 보인다. 우리가 미군 캠프에 가서 그들이 상영하는 영화를 함께 보기도 하고, 흑인 병사들이 우리 진영에 스며들어 세탁부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 천막에 와서 천막 자락을 쳐들고는 일본에서 듣고 배운 말로 "스코시, 스코시 (조금만, 조금만)" 하다가 우리한테 들켜서 달아나기도 했다.  오늘 점심을 먹고, 제천 전투에서 함께 수류탄 부상을 당했던 이건명(양정고등학교 3년생) 중사와 바람을 쐬러 나갔다. 저 멀리 들판에서 미군 병사 한 사람이 황소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된 소일까? 잡아 먹기 위해 사 가지고 온 소일까?`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거기 물방앗간 가까이에 한복 차림의 한 여인이 보따리를 하나 들고 소 있는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 여인을 보자 소를 타고 있던 미군 병사가 소에서 내려 그 여인을 끌고 물방앗간으로 들어갔다. 이 광경을 본 우리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 중사 여기 있어, 내가 가서 총을 가지고 올게"라고 말하며 연대 본부 천막으로 달려갔다. 곧 칼빈 소총을 가지고 와서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서 물방앗간 쪽으로 가고 있는데, 벌써 속전속결로 일을 마친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소를 몰고 서쪽으로 가고 미군 병사는 자기 캠프 쪽으로 걸어갔다.  "저 새끼 당장 죽여 버리겠어." 격분한 이 중사가 칼빈 소총 안전 장치를 풀면서 미군병사를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미군 캠프는 거기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총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이 전쟁 판에서 총소리 한 방 나 봤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사람도 없다. 착한 사람도 수없이 죽어 가는 판국에 나쁜 놈 하나쯤 죽여 봤자 양심에 거릴낄 것도 없다.  그러나 내 경우는 달랐다. 만약에 이러다가 일이 잘못되어 문제가 되면 지금까지 쌓아온 공든 탑이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이중사!" 고함을 지르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달려가서 총을 빼앗으며 "내가 쏘겠다"고 했다.  그는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다혈질로 의협심이 강하며, 막걸리에 밥을 말아서 먹기도 하는 괴짜이다. 그러면서도 일단 붓을 잡으면 온 정신을 붓 끝에 쏟는 열정 또한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전계에서 상장 쓰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이 중사, 우리가 참자." 화를 못 참고 펄펄 뛰는 그를 빌다시피 해서 겨우 말렸다. 천막으로 돌아오면서 우리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종편집:2025-06-16 오후 06: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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