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승지는 풍기읍, 춘양면, 화북면, 운봉읍, 용문면, 유구읍, 영월읍, 무풍면, 변산면과 현재는 합천군 가야면이 대상으로 알고 있다. 신문, 잡지, 인터넷 등 대부분의 매체가 합천 가야산 만수동이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가야산 만수동이 어디인가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합천군 가야면에 만수동이 있는데 어디인지 찾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십승지를 기록한 정감록 `십승지(十勝地)` 중에 가야산 만수동(萬壽洞)이 있다. 정감록에는 가야산 남쪽 만수동은 그 둘레가 이백리나 되며 오래도록 몸을 보전할 수 있는 곳이다(伽倻山下南 有萬壽洞 周回二百里 可得保有)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예언가 남사고(南師古)의 `산수십승보길지지` 등 여러 풍수지리 대가들도 십승지로 가야산의 만수동을 꼽고 있다. 가야산 만수동은 어디인가.
가야산 만수동은 세간의 주장과는 달리 성주군 가천면 마수리 뒷산 해발 623m의 능선에 만수동을 알리는 끔찍한 표지석이 말없이 비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자리잡고 있다. 모습은 거북이 등 모양으로 가로 2.5m 세로 1m 정도의 크기에 萬洞이라 큼직하게 조각되어 있다.(사진)
만수동 표지석으로부터 6~7m의 언덕 아래에는 평지가 있고, 아직도 예전 농사를 지었던 논과 밭의 형상이 그대로 있으며, 오랫동안 농사를 짓지 않아 이름 모를 나무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마수폭포쪽으로 합류되는 계곡물은 우렁찬 소리를 내면서 계곡길을 따라 흐르고 있다.
계곡을 따라 가다보면 옛날 처사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며 정국환담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陰倫坮(음윤대)가 새겨진 암석도 있다. 그 아래는 참석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예전 마수리 주민들이 소 먹이고, 땔감 나무를 하는 곳으로 마수리를 지켰던 친구는 어릴 적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만수동에 대해서 생생히 기억한다고 한다. 이곳이 살기가 좋은 곳으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만수동이라 이름 지어졌다고 했다고.
가천면은 동으로 수륜면, 대가면, 서로 김천 증산면, 북으로 금수면, 남쪽으로 가야산이 막고 있고 그 가야산 너머에는 합천 가야면이 있다. 지금 만수동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합천군 가야면이다.
"가천면 거주 주민들은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에는 해발 150m의 화죽동을 넘지 않았는데, 임진왜란을 피해 가야산으로 오르다 보니 범림, 아전촌, 사부랭이, 독산, 갈곡, 금바우, 돌티, 모래재, 마수리, 곰시 등 수많은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최근에는 없어진 옹기를 구웠던 옹기점, 거창 사람들이 가천장을 보러 넘나들면서 들렀던 상적, 월남, 염주 형상을 했다고 염주실, 형제봉 남쪽 깊은 골에 그 형상이 바늘을 매단 형상의 서침실에서 화전을 일구던 화전민은 지금은 살지 않는다. 그리고 마수리 위쪽 바위로 된 자연 미륵상이 있는데 그 골을 미륵당이라 불렀고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시 피난가다가 발견한 산성은 해발 800m에서 고랭지 채소농사를 지었고, 시어골에서 산성쪽 십리길을 가면 북다랑 마을 등의 흔적도 사라지고 있는 십승지의 마을들이다.
아마도 가야시대에는 독용산성이 축성되었을 만큼 비옥한 농토라 곡식 생산이 풍부했으며, 월항에는 세종대왕자 태실이 있는 명당 자리이고, 사도세자의 비극의 울분을 참지 못했던 한개마을의 이석문공은 북쪽으로 집을 짓고, 사도세자에 대한 충심을 보인 고장이 되었다. 한개마을에서 배출한 응와공께서 말년을 보냈다는 포천계곡의 만귀정은 지금도 많은 도시민들이 피서를 오는 곳이다.
십승지의 마을 만수동은 해발 4~500m에서 청정 농산물을 생산하고, 가야산에서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이 그 골에 사는 주민들을 신선으로 만들어 장수하는 마을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십승지의 만수동에는 아직도 집성촌의 흔적을 가지고 있어 마수리 김해김씨 진주강씨도 광해 임금때, 아전촌 김영김씨, 영산신씨, 사부랭이의 경주최씨도 임진왜란을 피해 이주하였고, 동원동의 경주김씨, 성주이씨도 그 시기에 이주를 하여 후손들이 아직도 살고 있는 곳이다.
가야산의 기운을 받은 성주는 사가정계곡에 가야산 생태 박물관을 지었고, 모래재로 이어지는 가야산 에움길에는 계절마다 피는 야생화들이 탐방객들을 반가이 맞이하는 누구에게나 힐링의 기쁨을 주는 곳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 청정지역에서 생산되는 친환경사과, 고랭지채소, 옥수수, 감자, 배추 등이 유명하며, 가야산의 향기를 담은 벌꿀, 버섯 등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가야산이 주는 약초도 십승지 고장의 명물이다.
조선 중기 대유학자 한강 정구 선생께서 즐기던 무흘구곡을 따라 보여주는 신선들이 놀았을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최근에는 성주댐이 생겨 대가천 하류 지역의 가뭄을 해결하여 더욱 살기좋은 고장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천하절경으로 최근에 개방한 가야산 만물상은 등산로 곳곳에 자리잡은 기암괴석이 연신 감탄을 자아낸다. 감탄을 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 등산하다 보면 어느새 서성재 고개까지 오르게 된다.
십승지 관련하여 정감록, 택리지, 성주지 등에 기술되어 있다.
만수동은 살기좋은 곳이라 사람들이 장수하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지어졌는데, 총독부가 百壽는 일반백성, 千壽는 왕이, 萬壽는 황제에게 적용되는 용어라 하여 강제로 馬首洞으로 바꾸었다가, 1914년 행정개편으로 일부를 법전동으로 이동시키고 말이 물을 먹는 형상이라 하면서 현재의 馬水洞으로 바뀌었다.
이제 성주 가야산 만수동 십승지를 명확히 하여 사람이 오래 사는 살기 좋은 곳이란 만수동이란 동명 회복이 가야산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표지석의 바람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