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에 석종출 선생의 `잊힌 낙동강···`과 전하수 선생의 `그때 그 시절···`의 두 기고문을 보니 70여 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정근후(鄭根厚) 선생이 선남면 수리조합장(내 기억) 재임 중일 때 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때였다. 그때 국회의원 출마하려면 제일 먼저 한 장짜리 달력에 사진을 실어 배포하는 것이 정치 입문의 일차 관문이기도 한 때였다. 그때 그 달력에 실린 정근후 선생의 풍모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난 그때 목동(소먹이기)이나 할 때였지만 미소 띤 얼굴에 중후함이 있어 지금까지도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역시 어릴 적 기억은 오래 간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땐 한자 시대이니 한자 이름도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당시 출마는 안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중후한 풍채가 이름자의 `두터울 후 자`와 결이 맞았기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실 옛날 생각할 때마다 수리조합장 이후의 행로가 어땠는 지가 몹시도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어 유감스러웠는데, 마침 그 후손 정재혁 씨가 내과의사로 봉직하고 있음을 알았으니, 이만해도 나름으로는 의미 있는 기억이 되어 마음이 가볍다. 게다가 선남면 동부지역의 농업용수 공급의 주도적 역할을 한 공적으로 선생을 기리는 공덕비도 세워졌다니 역시 누구나 삶의 궤적이 사후 표출되는 것이 사람 사는 이치의 본령이 아닌가 한다. 농업용수와 수리조합! 지금은 천수답이라는 말도 없지만 당시만 해도 시냇물의 보(洑)가 있으면 용수는 충분하지만, 가뭄이 계속될 때는 농민들도 걱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때로는 물꼬를 두고 이웃끼리 다투는 때도 있었으니 그럴 때 수리조합의 역할이 어땠는지를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농민들이 수리조합을 이끈 정근후 선생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집도 천여 평이 넘는 천수답이 있어 가뭄을 이겨내려는 형님들의 고초를 보고 자랐다. 웅덩이 파서 물이 고이면 두레박으로 퍼내어 시들어가는 벼 포기의 해갈이나 면하라 했던, 안쓰러워 눈물겹던(?) 일도 있었다. 다음은 `그때 그 시절···`의 전하수 선생의 다방 이야기. 먼저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레지(Lady)`가 아련한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이 나라 커피는 조선 철종 때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들여왔으며 고종이 아관파천 때부터 왕실에서 시용하다가 이후 귀족들의 기호식품이 되었으며, 그때 최초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 가배였다. 6·25 때 대구에 미군이 진주하면서부터 서양인들은 커피를 우리들 숭늉 마시듯 한다는, 시중에 떠도는 말을 듣기도 했다. 1953~4년도로 기억한다. 그때 미국이 그들 골프장 잔디가 한국의 토종만 못 하다고 하여 우리 잔디풀씨 주문이 왔다. 각 농가에 한 되씩을 채집하여 보냈더니 그 답례로 각 가정에 미군용 식품 `C레이션` 한 박스씩을 보냈는데 그 속에 은박지로 포장한 커피가 있었다. 가루우유, 과자, 통조림 등은 먼저 먹고 남은 것이 처음 본 커피뿐이었다. 아이들은 손톱으로 찢어 꺼내 먹기도 하고 그냥 빨아먹다가 입이 시뻘겋게 되어 찡그렸던 기억이 새롭다. 어른들은 `소태다!` 했다. 나는 20대 초 고령장을 가서 경찰서 앞거리에 다방 간판을 처음 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생소한 음료인 데다 비싸서 못 먹고, 청소년들에겐 유해한 카페인이 들어있어 있어도 못 먹게 했다. 어느 날 어떤 노인이 뭣도 모르고 궁금하여 다방 문을 열었다가 담배연기 가득한 실내를 보고 놀라 돌아섰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사실 커피라는 음료가 있는 줄 아는 국민보다 모르는 국민이 더 많았으며, 여유 좀 있는 사람이 고령 5일장에 갔다가 다방에나 가야 커피를 먹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이게 바로 금석지감이었다. 이에 반하여 대도시(서울)는 일제를 거치며 문인과 풍류객, 한량이나 모여 음악 감상을 하는 다방이 있었다. 그때 모일 장소도 없을 때 유일한 회합장소가 다방이었다고, 당시의 문인들이 회고하고 있다. 특히 명성을 얻은 소설가 김동리의 작품 `시인부락`이 다방을 소재로 한 작품(내 기억)이었으며, 이른바 화롯가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던 노변정담(爐邊情談)도 그때 나온 걸로 알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군 단위에서는 이른바 산업화 사회로 가는 길목이었으니 생활의 양태까지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시류에 맞춰 처음으로 다방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많던 `막걸리집`이 다방 간판으로 대체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땐 지인을 만나면 `막걸리나 한 잔 하자`가 지금은 `커피나 한 잔 하자`로 세태는 그렇게 변화하고 있다. 그때 다방을 주제로 한 대중가요도 나왔다. "(서울)종로라 뒷골목에는 다방도 많은데/ 그 다방 그 아가씨는 정말 친절해/ 눈웃음 간드러지게 아양을 떨면서/ 모닝커피 드릴까요 0000를···/ ~~~ 다방 아가씨." 누구나 살아가다 추억을 되새기면 새로운 감회가 살아난다. 더욱이 정근후 님이 그렇고, 전하수 님의 다방 얘기가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돌아보게 하는, 변전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최종편집:2025-06-16 오후 06: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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