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복지 법산의 집 사립문엔 늘푸른나무인 아름드리 회화나무, 약칭 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잎은 아카시를 닮았지만 가시는 없었다. 경사진 암반이었는지 덩치 무게를 견디지 못 하고 비스듬히 누워버려 통행이 부자연스러웠다. 군청에 애로사항을 건의했더니 업무가 면사무소로 이관되었고, 어느 날 면직원이 출장 나와 베어주어 고종명(考終命)을 고하고 말았다. `시원섭섭`은 이럴 때나 쓰는 말이었다. 그런데, 둥치는 토막으로 잘라서 가지런히 두고 남은 잔가지는 알뜰히 묶어 논 것을 보곤 역시 공무원의 봉사정신에 새삼 놀라기도 했다. 반세기도 더 전에 흔히 있었던, 국민 앞에 군림하던 공무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회화나무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교 문화를 상징한다고 하며 천자가 살고 있는 궁궐이나 선비의 무덤에 심었기 때문에 `선비나무`라고도 한다고, `나무 인문학`이라는 제호로 한 일간지에 났다. 특히 창덕궁의 천연기념물인 회화나무를 비롯해서 성균관과 성리학자들이 살았던 공간에는 예외 없이 심었다 했다. 그것은 순전히 관직이 목적이 아니라 바로 선비로서의 사회 지도층이 되어 스승이 되고자하는 데에 그 뜻이 있다고 덧붙였다. 또 선비는 세상의 변화를 읽고 대안을 먼저 제시하는 사람이며, 오래 묵은 회화나무의 옹이는 선비가 안아야 할 세상의 아픔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회화나무는 상처를 입어도 내색도 하지 않는다며, 선비도 결코 아픔을 내색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또 중국 북송시대 학자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와 위에 언급한 `옹이`에 관한 해설도 있었지만, 이를 이해하기엔 내 짧은 식견이 한계였다. 어쨌거나 계명대학교 강판권 교수의 기획기사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지금은 비록 그 회화나무는 안타깝게도 종말을 고했지만 내겐 의미 있는 기고문이었다. 회화나무가 선비를 상징한다는 말은 10대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이 집이 우리집이 되기 전엔 아버지의 숙부인 종조부의 소유였으며 향내에선 저명한 한학자였다는 것까지. 그때, 고인이 되신 우리 문중 종손(崔晶坤)과 작천 이순자 아버지 이규동(李圭東) 씨가 종조부 앞에서 한문을 배웠던 일은 다 아는 얘기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종조부의 위상이 어땠나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기사를 보니 나는 곧 옛날로 돌아갔다. 여름철 초저녁엔 나무에 올라 쓰르라미 우는 소리도 들으며 낮 동안의 농사일에 지친 몸을 나무에 걸터앉아 쉬기도 했으며, 지금처럼 미세먼지는커녕 별 총총 하늘을 보기도 했다. 또 북두칠성이 손에 집힐 듯한 청청한 밤하늘 풍정을 보는 것은 일상사였으며, 마치 하늘을 가를 듯하는 `별똥별(유성)`은 다반사로 보았다. 이를 떠올리니 `전원일기`의 한 컷이 연상되고, 나무에 올라 `저 별은 나의 별` 등의 가요를 부르던 그 추억의 회화나무를 소환(?)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나무가 유교 문화와 선비의 상징 등의 여러 의미가 있었다는 데에 새삼 놀랐으며, 그것도 몰랐느냐는 따끔한 질책도 당한 기분이었다. 나무들을 인격화하여 스승으로 삼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그 기사 도입부에 실리었다. 가장 쉽고도 가까운 예는 매란국죽의 사군자와 소나무 대나무 매화의 세한삼우였다. 또 조선 헌종 때의 서화가 김정희를 빼놓을 수가 없다. 묵죽도가 있었으며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국보로 지정된 `김정희필세한도`였다. 이 지구상에 현생 식물 수종이 얼마인진 그때도 몰랐으며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그땐 수종 불문, 어떤 나무이거나 화마의 소굴(?)인 아궁이에나 집어넣으면 제 몸 태워 인간을 위한 자기희생을 기꺼이 한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 중의 회화나무는 고결한 의미를 함의(含意)한다는 상식을 지금 알게 되었다. 특히 그 나무 울안에 살며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그 의미를 이제 알았다는 게 조금은 머쓱했다. 어느 봄날에는 뼈에 좋다는 인동초를 삶을 때 아버지가 회화나무 잎과 열매가 약효가 있다고 하여 그 가지도 꺾어 넣었던 기억은, 역시 인간의 건강에 기여하는 나무임이 여실했다. 세상 만물은 모두 존재감이 있다는 것을 뉘우치게도 했다는 말이다. 지금에 와서 의문이 남는 것이 하나 있다. 당시 한학자인 종조부의 부친 고조부께서 그 나무가 선비의 상징인 줄 미리 알고 아들 장래를 위한 배려로 심었는지, 또는 소년 적의 종조부가 직접 심었는지가 몹시도 궁금한 오늘이다. 혹여 자생(自生)했다면 그 의미가 더 클까···?
최종편집:2024-05-14 오전 1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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