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江)을 처음 보것네.
-------------------------------------------
이 시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해질녘, 벌겋게 타오르는 ‘가을강’이다. 강이 아름답기는 바로 이 때, 건넌산이 단풍으로 활활 타오르고 그것이 노을을 끌어안고 거꾸로 저무는 강에 풍덩 빠지면서, 강 전체가 노을인지 단풍인지 흐르는 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럴 때 가을강은 그 앞에 선 이의 얼굴과 마음을 먼저 붉게 붉게 물들인다.
산등성이까지 걸어 온 시인의 눈에 들어온 가을강의 아름다움도 이럴 것이다. 시인은 제삿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고, 저물 무렵 산등성이에 이르러 불빛 어리는 그 강을 내려다본다. 그가 떠올리는 것은 친구의 못다한 사랑 이야기지만, 실은 바로 자신의 ‘그 기쁜 첫사랑’의 소리를 듣고 있다. 그 사랑은 미움이나 아픔까지 모두 녹여서 소리 죽여 말없이 흐르고 있다.
......깊은 강이 멀리 흐른다 했던가. 바다 가까운 하구까지 밀고 온 물결의 힘에 실려 시인의 사랑이 깊어졌지만, 이 시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나라의 가을강은 더욱 서러워졌다.
배창환(시인 . 성주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