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도 전 이 나라는 눈물 나는 초근목피의 계절도 겪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국민소득 4만 달러를 향해 간다니 그야말로 금석지감이다. 라면 얘길 하자니 제일 먼저, 서울아시안게임에서 육상 3관왕에 오른 임춘애가 떠오른다. 그 화제가 당시로는 `배고픔의 상징`일 수도 있었다. 그의 신장은 평균치였지만 비교적 깡마른 체구였으니 신문은 칭송하느라 썼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헝그리 정신`이라 극찬, 미화의 상징이 된 결과이고 말았다. 한 봉지 값이 10원이었으니 이하는 불문가지다. 시대에 맞춰 `배고픔부터 해결하자`는 박정희 대통령도 `얼큰한 라면` 보급을 독려하는 메시지도 있었다고 오늘의 신문은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으니, 생산회사(삼양)는 이 나라 라면 산업의 효시가 될 수 있었다. 반면 20년 넘게 시장을 장악하던 삼양에 날벼락 `우지(牛脂) 파동`의 흑역사도 있었다. 공업용 소기름을 라면 제조에 썼다는 것이다. `배고픔`부터 해결해야 할 때이니 식품에 사용 여부는 따질 새도 없었음이 사실일 것이었다. 당시 상류층은 비난, 불매운동까지 했으며 삼양이 허우적거릴 때, 식품위생검사의 결론은 `이상 없음`이었으며 대법원 판단도 무죄였다. 라면의 흑역사도 있다. 2014년 세월호 사건 현장을 찾은 교육부 장관이 의전용 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다가 면직된 일과, 퇴임한 대통령(문재인)은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 터졌을 때 컵라면과 라면과자 `뿌셔뿌셔`를 먹는 사진을 올렸으므로, 이를 본 유족들이 `지금 라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며 `유족 조롱`이라고 격렬 항의했다고 당시의 신문에 났다고 했다. 나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런가 하면 `흑역사`라고 하기엔 맥락이 맞지 않는, 애틋한 비감(悲感)의 감성을 촉발한 사건도 있었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숨진 19세의 청년 가방에는 컵라면이 들어 있었던 것 말이다. 뿐만이 아닌 백역사도 있다. 아카데미상 4관왕이 된 우리 영화 `기생충`에서 세계적 인지도를 획득한 짜파게티와 너구리(라면)를 섞어 끓인 `짜파구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심 회사는 조리법을 11개 언어로 시연하기도 했다 한다. 또 다른 백역사는, 노무현 대통령은 주말마다 청와대에서 직접 라면을 끓여 먹었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은 또 수준급 요리 실력이 있다는 윤석열 대통령은 `윤석열 라면`이라 이름 지어 `자기식`으로 라면 요리를 한다는 것이었으며, `석열이형네 밥집`이라는 요리도 있다는 것이다. 라면의 역사는 삼양라면으로 시작됐으며 그 삼양이 곤두박질 칠 때 위기를 기회로 삼은 듯 농심 `안성탕면`과 `신(辛)라면`을 출시하여 잇따라 1위를 탈환하기도 했다. 동시에 겁라면과 사발면 등의 자동판매기도 개발하고, 그 인기의 척도를 가늠하는 성공 신화도 있었으니, 그것은 알프스의 정상급 고지에도 식사대용과 간식용으로 컵라면의 깃발을 꽂은 일이다. 그게 바로 `K푸드`였다. 나도 그때 처음 먹어본 느낌으로 지금도 `삼양`에만 손길이 간다. 지금은 그 라면이 매장의 매대(賣臺)를 꽉 채우고 있어 대충 세어도 제조회사는 30여 군데가 넘어보였다. `배고픔부터 해결하자`는 박정희와 함께 `한강의 기적`이 떠오름을 부인할 수 없다. 역시 우리집 가정사도 떠오른다. 1965년도였다. 내가 갓 제대했을 때 당시 서울에 사시던 형님이 법산 집에 오시면서 50개들이 라면 한 상자를 갖고 오신 것이다. 그때만 해도 사과 포장상자는 20Kg이었을 때이니 내 기억(50개들이)에 오류는 없을 것으로 안다. 모르긴 해도 그때까진 시골에서는 라면이라는 말만 있었을 뿐 실제 먹을 기회는 없었을 때(순전히 내 기억) 그 라면의 값어치는 상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그때 어머니와 큰형수가 시식을 한 후 첫마디 `그 참 희한타!`라며 `이젠 보리밥 안 먹어도 되겠다`라며 흡족해 하시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두 분의 얘기를 `식문화의 새 시대(첨단)`라는 뜻으로 의미를 확대, 부여하기도 했다. 라면에 대해선 1970년쯤으로 기억되는 내 개인사도 있다. 결혼 석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대구 번화가인 동성로에서 군용 소형차에 치여 대구 육군병원에 한 달 간 입원한 일이다. 그땐 월남전이 치열할 때였으니 후송된 전상(戰傷)환자로 대형 병실을 꽉 채우고 있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은 중상자는 예외로 하고 경상자는 식사 때는 물론 간식 시간이 되면 라면 끓이는 그 냄새가 병실을 진동하기 예사였다. 나는 환자 급식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그래도 젊었으니 바로 말해 `후루룩!` 그 소리가 내 식욕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냄새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내 코와 입만 고역(?)을 치르게 했다. 환자가 대놓고 별식을 할 수도 없고······. 지금은 그 라면이 대중식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한참 전 이른바 `꼰대`들이 배고팠던 지난날을 얘기할 때마다 MZ세대들은 `그러면 라면이라도 사먹지···`라는 희화화의 유행어가 됐던 것은 다 아는 얘기다. 오늘의 선진국의 대열에 당당히 선 그 이면의 식료 역사는 한두 가지만 있을까만, 라면 소비가 주식(主食)인 쌀 소비를 위협하기도 했다는 통계와 함께 그 수치로도 두 식량이 비슷할 때도 있었다고 논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그 라면이 환갑을 맞았으니 내 가정사와 함께 나의 라면에 얽힌 얘길하며 옛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최종편집:2024-05-14 오전 1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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