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부산항에서 단군할아버지가 나라를 세운지 5천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나라 국군이 해외에 파병이 되었다. 즉 베트남에 파월장병을 싣고 배가 출항한 것이다. 그 배에는 나의 외삼촌도 승선해 있었다. 비둘기 부대에 파견되어 전투보다는 부서진 건물 복구, 다리 건설 등 주로 공병부대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약 3년 후에 귀국했을 때 여러 가지 귀한 미국산 녹음기, 카메라, TV 등 전자제품과 식료품을 많이 가지고 오셨다. 그때는 시골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전자제품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당시 나는 미국산 버터를 실컷 먹은 기억이 있다. 밥에 여러 가지 나물과 고추장, 버터를 넣어서 비빔밥을 해먹었는데 그 맛은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미국산 볼펜도 학교 친구들에게 몇 개 나누어 주었는데 친구들이 매우 신기해 하였다. 그런데 한국생활이 따분하다고 생각하여 1년 후에 다시 백마부대 수색중대에 지원하여 또 다시 월남전에 참전하였다. 두 번째 참전에서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많은 고생을 하신 것 같았다. 귀국 후에 팔과 다리에 총탄과 수류탄 파편을 맞은 흔적이 남은 상처를 보여 주셨다. 월남전 얘기를 들려달라고 했더니 작전을 나가면 헬리콥터에서 맥주, 음료수, 과자, 캔, 초코렛 등 여러 가지 식료품이 담긴 상자를 떨어뜨려준다고 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기 전이어서 세계에서 후진국에 속해 있었다. 시골에서 이러한 고급 음식과 음료수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키가 176cm 정도에 영화배우 신성일 씨를 닮은 미남형이었는데 군대 막사에서 미군 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은 정말 멋있어 보였다. 그런데 30대 후반에 외삼촌은 알 수 없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고엽제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글의 풀을 제거하기 위해 비행기에서 살포한 일종의 제초제인 것이다. 농약을 살포한 정글에서 전투를 해야 했으니까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지금 현재 살아남은 용사들은 고엽제의 영향이 인정되어 다소간의 연금을 받는다고 한다. 베트남(월남)전에 참전한 용사들의 죽음과 피땀 어린 노력으로 외화(dollar)를 벌어 들여와서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산업화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그리고 월남전에 참전한 장병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6.25 전쟁의 참화를 겪은 잿더미 위에서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최종편집:2024-04-19 오후 06: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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