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코스모스 잎에 맺혀있는 이슬방울로부터 비롯되는가 보다. 빨간 고추가 지붕 위에 널려있는 가을이 되면 어쩐지 편지 쓸 곳이 많아진다 이때까지 쓰지 못한 아쉬움과 한꺼번에 쓰고 싶은 충동이 밀어닥친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한 친구, 생활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먼 객지로 떠난 친구, 이미 유명을 달리한 친구, 지금은 모두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모두 다 보고 싶은 얼굴들이다. 그러나 이미 하늘나라에 가버린 친구에게는 한 장의 엽서라도 부칠 길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사실인가? 몇 년 전 추석이었다. 우리 또래의 친구들은 우연히 마을 앞 동산에 모이게 되었다. 저 건너편에서는 미풍이 메밀밭 이랑을 달리고 달빛을 담뿍 실은 짜릿한 메밀꽃 내음새가 너무나 인상적인 밤이었다. 우리들은 청솔가지 잎새로 새어드는 달빛을 받으며 지난날 추억을 애기하다가 문득 조용해졌다. 중천에 떠오른 달이 너무도 아름다운 탓이었을까? 교교히 흐르는 달빛이 너무나 엄숙하여 모두 다 압도된 기분이었다. 저쪽에서는 동네 꼬마들이 숨바꼭질을 하느라고 요란스러운데 우리들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중 한 친구가 한참동안의 침묵을 깨뜨리고 얘기를 꺼냈다. 저 달은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라고. 슬플 때나 괴로울 때 달을 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후련해진다고 했다. 나도 마치 거기에 동화되어 버린 것 같았다. 지금은 먼 나라로 떠났지만 어린 날 소꿉친구와 우물 안에 떠 있는 달을 두레박으로 건져 올려 손에 잡으려고 하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손에 건져 올리려고 했으나 사라져 버린 달을 보고 발을 구르며 울던 그때, 달에는 계수나무가 있고, 옥토끼가 떡방아를 찧는다는 옛날 할머니들이 들려주던 얘기, 아름답게 흐르는 달빛은 달나라에 있는 토끼가 뿌리는 떡가루라고 생각 하던 그 어린 시절. 그러나 현실은 그 전설을 허락할 수 없으니 얼마나 가슴 허전한 일인가? 인간이 달을 정복한 후로 나는 기계문명을 저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리 기계문명이 발달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과학이라면 아무 쓸모가 없지 않은가? 메커니즘(mechanism)의 노예로 전락해 가는 우리 인간들이 어리석을 따름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죽마고우이던 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어릴 때의 신장염이 재발한 것이었다. 병석에 누운 친구의 얼굴은 너무 핼쑥했다. 말하자면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국민(초등)학교 다닐 때 핸드볼 선수까지 지낸 튼튼한 그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해 보였다. 천주교 신자이던 그는 목에 십자가를 걸고 있었다. 신앙의 힘을 빌어 재생해보려는 마지막 몸부림인 줄은 나도 몰랐었다. 괴로운 표정으로 그 친구 왈 "내가 살아 날 수 있을까?" 삶을 포기한 채 모기 소리 만 하게 내뱉는 한마디였다. 나는 그 친구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죽음 앞에 선 순수한 인간본연(人間本然)의 모습이었으리라. 나는 그의 절망적인 물음에 인색할 수가 없었다. 요즘 달나라까지 가는 세상에 그까짓 병 쯤 못 고치겠느냐고 반문했다. 너는 살아날 수 있으며 또한 네 곁에는 주예수가 돌보신다고 했다. 내가 그에게 위로할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격려의 말도 한 가닥의 희망도 저버린 채 그 이튿날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날이 바로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그날 밤 찬바람이 몰아치는데 옥토끼가 뿌리는 차가운 달빛을 받으며 그는 들것에 실려 영원한 안식처로 떠났다. 이번 추석엔 그의 무덤이라도 한번 찾아볼 여유를 가져야겠다.
최종편집:2024-05-14 오전 1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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