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교 때의 은사이시며 사사롭게는 재종형님이시고, 본지 최성고 대표이사의 아버님이신 최훈동(호 丘晃)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오호애재(嗚呼哀哉)! 2, 3년 전 남은와 친족회 때 한번 뵌 이후 죄송하게도 명절 때에나 문안 전화만 드린 게 제 불찰이었음을 돌아보게 되니 더욱 송구하옵니다. 근간에 제 사제(舍弟)로부터 건강하셔서 성음(聲音)만 듣고도 건강이 창창(蒼蒼)하시더라는 전언을 듣기도 했는데, 어이 그리 귀천(歸天)을 하셨습니까. 형님! 형님보다는 `선생님`으로 일컬음이 예를 다함일 것 같으오니 널리 해량(海諒)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으로 호칭하겠습니다. 선생님! 대단히 외경(畏敬)스러우나, 역시 긴긴 조선 왕정이 끝난 그 어려운 때에 일찍이 이 나라 교육 일선의 교단에 서서 봉사하신 선생님이야말로 선견지명이 계셨다고 해야겠습니다. 선생님의 솔하(率下)를 돌아보니 여실하다이옵니다. 선생님의 그 뜻에 따르느라 역시 박사 교수에다 사위까지 교육 현장에서 정려(精勵)하고 있으니 결코 우연은 아니리라는, 제의 짧은 사려(思慮)입니다. 게다가 딸 사위까지 대학 교육의 박사와 교수이니, 외람되오나 `교육의 명가`라 해도 부족함이 없겠사옵니다. 이러한 데다 한 자제는 오늘의 정보통신의 시대를 붙좇느라 저널리스트로 사회봉사를 하고 있으니 더더욱입니다. 어쩌면 선생님이 명가를 이룬 본원(本源)이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을 존경할 수밖에 없을까 합니다. 위에서 언급은 했습니다만 반세기도 훨씬 전 고명딸 연숙(娟淑)이를 기억합니다. 그날 연숙의 4촌인 성희와 제의 질녀 인숙과 우리 사랑방에서 귀염성 넘치는 세 아이가 재잘재잘 놀던 정경(情景) 말입니다. 그 중의 한 특별히 명민(明敏)한 귀염둥이(연숙)가 오늘에 와서 교육학의 박사가 됐다니, 돌아가신 선생님을 추상(追想)하게 되고, 살 같이 빠른 세월을 느낍니다. 한편으로는 참으로 기쁘고 즐겁고…. 언제 한번 볼 수나 있을런지? 선생님! 저의 지사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당시 선생님의 재지(才智)가 얼마나 뛰어나셨던지 사생(社生)책에 실린 사진이 아닌 삽화를 모두 칠판에 그려놓고 강의를 하던 때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책의 워딩과 삽화보다 더 사실적이었으니 아이들은 선생님의 강의에 푹 빠졌던 것입니다. 더구나 아이들은 간혹 스윽 슥 분필 소리만 날 때도 교실이 너무 조용하여 숙숙(肅肅)한 분위기로 칠판만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 상당수가 교과서를 살 수 없어 옆자리 아이 책을 함께 보는 시대였으니 선생님의 진지한 칠판 그림솜씨에 흠뻑 빠져 아이들이 그런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땐 저도 4학년이 돼서야 공책을 살 만큼 어려울 시대였으니, 교과서 없는 강의에 그런 재지의 발상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옵니다. 만일 그때 그림솜씨 없는 다른 선생님이었으면 학습 분위기가 어땠을까를, 지금 돌이켜 보니 정말 상상이 안 됩니다. 그렇게 열악했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가히 상상도 못 할 일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아이들 노래 실력을 보느라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제 생각에 아이들은 평소 애국가 첫 소절의 `마르고 닳도록`에서 `마`를 꼭 2도 낮춰 부르기에 이를 고치겠다는 우쭐한 생각에서 2도 올려서 불렀더니 `맞게 부르는 구나!` 하시면서 들은 칭찬이 지금도 새롭고 부끄럽습니다. 돌아가셨으니 더욱 애련(哀憐)히 떠오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풍금과 함께 `마르고···` 한 소절만 불러 교정까지 해주면 맞게 부르다가도 전체를 부를 때는 도로 2도 내리는 코믹함도 있었으니, 영락없는 우화(寓話)이겠습니다. 선생님의 영전에 졸문(拙文)을 상장(上狀)하고 추고(推考)하오려니 또 회억(回憶)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 재임 때만 해도 이른바 블루노동자만 노동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일 때 선생님처럼 `화이트노동자`를 노동인의 범주에 넣는 것이 정서적 불합리가 사실일 때였습니다. 그래서 당국으로부터 상당한 핍박을 받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오늘의 이 광대한 `전교조`의 성공한 조직을 보니, 이 또한 선생님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慧眼)이 있었던 것으로, 사려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선생님! 이 졸문을 접으며 꼭 한 말씀 올리려 하옵니다. 어쩜 그리도 다복하신 4남1녀를 두셨사옵니까? 더욱이 모두들 선생님의 원대한 뜻에 따라 교육으로 입신(立身)을 했으니 말이지요. 성공한 `교육의 명가`임이 여실(如實)하기 때문이옵니다. 선생님! 가톨릭에 돈독하신 둘째 며느님이 기원하심에 따른 명복을 제발 누리시고 승천하시옵길, 이 미욱한 제자가 다시 빌어드리옵니다. 영생복락으로 부디 영면하소서!!!
최종편집:2024-05-14 오전 1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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