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 일깨운 절규 친일 매도는 민족적 비극
고향 주민 멸시와 냉대에 편히 쉬지 못할 듯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가야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다.
새벽길 찬 서리가 뼈 골에 스미는데
어디로 흘러가랴 흘러갈 소냐
백년설이 부른 불후의 명곡 「나그네 설움」의 3절의 가사 내용이다.
일제의 등살로 고향 땅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어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나그네에게는 정처가 있을 리 없다. 고향도 나라도 빼앗긴 겨레, 걷고 또 걸어가 보지만 어느 땅 어느 하늘 아래 정처할 곳이 있으랴.
눈앞에 펼쳐진 거리는 무척 낯이 익는데도 타국보다 더 차갑게 느껴진다. 내 민족이 살고 있는 조국이지만 감시와 압박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곳이 차라리 타국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나그네는 그래도 어딘가 가야 한다. 가야할 그 지평선은 너무도 아득한데 길을 밝혀줄 태양마저 없어 어둡고 황량할 뿐이다. 새벽길 찬 서리 뼈 속에 스미듯 차가운데 나그네는 어디를 향해 가야할지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백년설은 이 노래의 가사에 가락을 실어 민족의 아픔과 설음을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그리고 일제에 대하여 가슴속에 맺힌 한을 절절히 읊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노래는 우리 민족의 가슴을 울려주면서 넓고 넓게 끝없이 퍼져 나갔던 것이다.
백년설노래는 민족혼 일깨운 절규
백년설 아니 이창민, 그는 성주농업보습학교 재학시절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던 중형이 독립운동을 하다 형무소에서 고문에 의해 옥사한 후 한 줌의 재로 변하여 돌아온 것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는다.
그는 한국인 학생을 구타한 일본인 교사에 대한 항명사건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요시찰대상자로 낙인되어 이후 줄곧 경찰의 감시를 받는다.
1938년 12월 그는 동북항일연합군에 의한 혜산진 보천주재소 습격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작사자인 조경환(曺敬煥)과 함께 경기도 경찰국 고등과에 잡혀가 밤새 심한 고문을 받았다. 새벽에 겨우 풀려난 그들이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담배 갑에 적었다는 가사가 바로 「나그네 설움」의 제 3절이다.
1940년에 백년설은 또 「눈물의 백년화」, 일명 「달이 없는 사막」을 불렀는데 이 노래 때문에 또 곤욕을 치렀다.
타홍아 너만 가고 나만 홀로 버리기냐
너 없는 이 천지는 불꺼진 사막이다
달 없는 사막이다 눈물의 사막이다
타홍아 타홍아 타홍아 아! 타홍아(1절)
식은 정 식은 행복 푸른 무덤 쓸어 안고
타홍아 물어보자 산새가 네 넋이냐
버들이 네 넋이냐 구름이 네 넋이냐
타홍아 타홍아 타홍아 아! 타홍아 (3절)
이 노래의 가사에서는 조국을 타홍이라는 연인에 비유했다. 타홍이라는 연인의 죽음은 곧 민족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대가 없는 이 세상은 불꺼진 사막이나 달 없는 사막, 그리고 눈물의 사막과 같다고 절규한다.
그리고 정도 행복도 사라져버린 형해(形骸)를 쓸어안고 조국의 혼을 불러 본다. 산새·버들·구름이 사랑하는 애인의 넋이듯 그 곳에는 독립을 꿈꾸는 한민족의 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곳을 향해 애절하게 조국의 혼을 불러보는 것이다.
일제당국은 미쳐 이 노래를 알아차리지 못하여 용케 검열을 통과했으나 곧 이를 발견했다. 작사자, 작곡가, 가수 세 사람이 일본경찰에 불려가 심한 고통을 받았다. 노래도 금지처분 되었다.
1940년 8월 그는 또 하나의 히트곡 「번지 없는 주막」을 불렀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 비 내리는 이 밤도 애절쿠려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자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1절)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그것은 나라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지도상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야 할 좌표마저 사라진 조국이다.
「창살」은 감옥이오, 「태질」은 모진 매질이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앉아 있는 나그네는 백년설 자신이고 우리 민족이다.
이 노래는 염정(艶情)가요의 형식을 빌어 일제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수난과 생활감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번지 없는 주막」이 히트를 하자 백년설과 작사자인 박영호는 또 경찰에 불려 갔다. 그 노래에 무슨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호된 추궁을 받았지만 끝까지 단순한 염정가요라고 우겨 겨우 넘어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그가 불렀던 노래는 대부분 나그네, 고향, 이별 등을 주제로 하여 민족의 애환과 울분을 담고 있었고, 나라 잃은 슬픔과 한의 정서가 구절구절 절절히 스며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일제에 대한 원한이 집약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는 민족의 새벽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백년설은 말하자면 한민족과 망국한과 망향의 슬픔을 노래의 가락에 실어 울부짖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서 가물거리면서 꺼질 듯 말 듯한 민족혼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이 민족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그러나 백년설의 노래인생은 결코 영광만이 아니었다. 노래마다 일본경찰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였고 그때마다 그는 경찰에 불러가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심한 수모를 당했다. 그의 노래인생은 참으로 험한 가시밭길이었다.
하지만 백년설은 그 수모와 고통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가 무대에 서서 그 울분과 한을 청중을 향해 절규했을 때, 귀로는 그들의 환호성을 들었고 눈으로는 그들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노래를 통해서 이 겨레에게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는 긍지를 가졌고, 그것은 곧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에게 위안을 주었고 일제로부터 받는 수모와 고통을 견뎌내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훼절가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일뿐
그런데 1943년 난데없이 소위 친일가요 「혈서지원」이라는 노래와 「아들의 혈서」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못배길 입장이 발생했다.
「혈서지원」의 레코드는 1943년 11월에 나왔는데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조선징병제 실시기념」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이 노래 가사는 손가락에 흘린 피로 일본 국기를 그리고 일황의 장수를 외치며 그 병정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작사자, 작곡가, 가수 모두가 당시 오케이레코드사의 톱클라스가 동원되었다.
백년설은 이 노래의 1절을 부르고 2절은 박향림, 3절은 합창, 4절은 남인수가 불렀다. 이 노래의 B면은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의 친일가요 「2천5백만 감격」이 실렸는데 남인수와 이난영이 불렀다.
이 노래를 제작한 오케이레코드사의 사장 이철은 철저한 반일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1939년 그는 조선악극단을 만들어 일본 공연에 나섰다.
동경에서는 궁성참배와 육군병원 위문을 강요했고, 공연에서는 인기가수로 하여금 예정에 없던 일본군가를 부르게 했다.
오사카 공연에서는 한국어 사용을 금지시키고 한복을 못 입게 했다. 도 장치에 사용된 태극 문양을 트집잡아 사장이 불온하다 하여 공연책임자를 10일간이나 감금시켰다. 이철이 달려가서 이에 항의하자 아예 같이 감금 해버렸다
.
일제는 마침내 이철에게 친일가요를 만들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거부하면 빅타나 콜롬비아레코드회사처럼 폐쇄한다고 위협했다.
백년설에게는 거부할 경우 가요생활을 못하게 하고 남양군도에 위문단원으로 보내겠다고 위협했다. 반면 노래를 부르면 출연료를 인상해 주겠다고 회유했다. 그를 모셔가기 위해 방송국의 차를 대기시키는 친절까지 베풀었다(실제는 그가 거부할 경우 그를 압송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이 갈림길에서 그는 어찌 해야 할까? 일체의 공연활동을 중단한다면 당장 생활에 큰 타격을 가져온다. 아내와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살아갈 길이 막막한 것이다. 또 설사 일본말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허가받는다 할지라도 누가 그 노래를 듣겠는가?
청중이 없는 가수란 곧 가수로서의 생명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남양군대에 위문단으로 간다는 것은 말이 공연단이지 사지에 징용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서 돌아온다는 것은 보장받기 어렵다. 또 그들의 기세로 보아 무슨 죄목을 씌워 어떤 중벌을 내릴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도 반일정신과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백년설 이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훼절(毁節: 절개나 지조를 깨뜨림)의 길을 걸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떠올리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방송국으로 옮겼던 것이다.
우리나라 가요사에서 일제 말기에 이르러 훼절가가 등장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백년설이 훼절가를 부른 것은 그의 일생일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일제하 실상 외면시 모두가 친일
백년설의 노래를 좋아했던 수많은 사람들, 특히 그의 민족의식에 존경과 신뢰를 보냈던 많은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백년설이 훼절가를 부르지 않아도 될 구원의 손길이 왜 그에게는 미치지 못했을까?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모진 학대를 당할지라도 그 요구를 물리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신은 왜 가져다 주지 못했을까?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당시의 실상을 잘 모르는 사람, 또 그러한 절박한 입장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의 부질없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 놓여진다면 그와 다른 처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을까?
그런데 이러한 상황과 관련하여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그의 예술인생, 특히 훼절가를 부른데 대하여 이런저런 평가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달리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훼절가를 불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예술인생 전부를 똑 같은 차원에서 평가절하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투철했던 민족의식을 가지고 일제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아가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절규했던 그 가시밭길의 행로를 무위로 돌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특히 그가 훼절가를 불렀다고 해서 그가 부른 다른 노래, 예를 들어 「나그네 설움」도 「번지 없는 주막」도 불러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혼자서 입 속에서 중얼거리는 것은 모르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그가 부른 노래를 부르고 그리고 박수를 보내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근거는 무엇일까? 백년설의 노래를 사랑하고 좋아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함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할까?
만일 이러한 논리를 가감 없이 철저히 적용한다면 이광수의 「흙」도 「사랑」도 읽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심지어 최남선이 지은 「독립선언서」도 3·1절 기념식상에서 읽어서는 안 된다는 넌센스로 비약될 수도 있다.
일제시대 일제에게 도움을 준 모든 행위를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친일로 간주하여 매도되어야 한다면 강제로 징용에 끌려가서 전쟁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탄광에서 석탄을 채굴했거나 군사시설의 건설을 위하여 땅굴을 파는데 동원되었던 사람도 친일로 매도되어야 하는가?
또 총탄을 만들라고 놋그릇을 내어준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어찌할꼬? 이 분들은 일제에 의해 희생당한 선량한 우리 국민일 뿐이지 결코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대상은 아니다.
혹자는 말하리라. 그 평가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야 한다고. 지식수준이 높은 사람은 또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은 더 엄격하고 높은 도덕적 기준이 요구되는 것이라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을 받는 절박한 상태에서는 처신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는 거의 비슷하다. 비록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객관적으로 확연히 선을 그을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50보 100보의 차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일제시대의 사정을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데나 돌을 던질 수는 없는 것이다.
타지역 추모행사 활발, 오호 통제라
한 달 전쯤으로 기억된다.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KBS가 주관하고 진주시가 후원하는 가요무대가 열렸다. 진주출신 음악가인 가수 남인수, 작곡가 이재호와 이봉조 등 세 사람을 기리기 위한 음악회였다.
먼저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영상으로 흘러 나왔다. 이어서 남인수가 부른 노래 몇 곳을 가수들이 불렸다. 많은 박수가 나왔다. 이어 백년설이 부른 「나그네 설움」이 역시 영상으로 흘러 나왔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또 이어 어느 가수가 「번지 없는 주막」과 또 다른 몇 곡의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들은 이재호가 작곡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주에는 이와 같이 해마다 남인수를 기리는 음악회가 열린다. 또 목포에서는 이난영을 기리는 음악회가 수 십년째 매년 개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난영의 기념공원이 조성되고 경기도 파주에 있었던 그의 묘도 옮겨왔다.
그런데 진주에서는 남인수의 노래도 부르고 백년설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렇게도 좋아하면서 환호하는데 성주라는 땅에서는 왜 백년설의 노래를 불러서는 안되는 것일까? 진주 사람은 남인수의 노래를 불러도 되는데 성주 사람이 백년설의 노래를 불러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진주공원에 있는 남인수의 노래비는 모든 진주시민들의 애호를 받는데 성주공원에 있는 백년설의 노래비는 왜 오물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성주는 유현의 고장이오 항일의 고장인데 진주는 그렇지 않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진주에는 수많은 석학이 배출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진주성 싸움에서 6만의 군·관·민이 순사(殉死)한 충절의 고장이고 일제시대에도 애국지사와 의병들이 활동했던 근거지다.
성주사람들은 의식수준이 높고 진주사람들은 낮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닌 듯 하다. 진주는 교육도시로 대학이 여러 개 있고 전국에서도 문향과 예향으로 이름이 난 곳이다.
모든 사람은 특정한 사안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평가하는 것은 자유다. 그것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다를 사람의 생각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도록 요구하는 것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같이 갈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일에 좀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가능한 한 관용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나는 백년설의 노래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그분의 노래를 들을 때면 때로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솟는다. 아마 이러한 생각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주위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수없이 많은 것을 나는 확인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다. 이제 백년설 그분은 가고 없지만 그가 이 민족의 한을 절절히 절규했던 「나그네 설움」은 계속 불리워져 애창곡 순위 1~2위를 좀처럼 양보하지 않는다.
아마 이 민족이 이 한반도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한 「나그네 설움」은 누가 뭐라고 하든 민족의 노래로 영구히 남아 길이길이 불리워 질 것이다. 그리고 그 가락은 전국의 방방곡곡에 넓고 넓게 메아리치며 펴져 나갈 것이다. 그 속에는 내가 부른 가락도 섞여 있음은 물론이다.
백년설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장 주 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