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16세기 후반 회연정사 백매원(檜淵精舍 百梅園)의 340여 대학단의 위기지학(爲己之學註1)은 당시의 유림학풍의 근간을 이루던 사조이었다. 필자는 회연서원 초대원장 竹軒 崔恒慶선조의 12대손(星州 法山 永川崔氏) 으로 2000년 봄에 한강연원가 후손으로 구성된 “회연서원 보존회”회장의 임을 받았다. 이는 회연서원과 오문 오암서원(鰲巖書院)과의 관계를 볼때 거금 380년만의 祖孫의 만남이라 감개가 깊다. 그것은 선생몰후 죽헌선조께서 회연서원 초대원장으로 추대되고 한강문집을 직접 편찬하셨기 때문이다. 이 보존회 모임에서는 한강선생의 학덕현양의 제1 긴요사업으로 문집번역사업이 거론되었다. 필자는 수억이 소요되는 문집번역사업을 추진하는 선봉에 서서 심혈을 기우려 온지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천만다행으로 마침 민족문화추진회 李佑成회장의 배려로 번역계획순서에도 없는 한강문집 번역의 결정을 본 것은 2001년 봄이었다. 매년 1책씩 전5권으로 전액 국고지원으로 번역하게 된 것은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무려 6년간의 산고 끝에 완간을 보고 드디어 학술대회까지 개최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다. 이 공을 이우성 교수에게 돌리며 번역에 임한 송기채 교수 등 민족문화추진회에 감사를 드린다. 번역서보급은 보존회 鄭健容부회장의 주선으로 후손종인 鄭仁祚회장 삼건사 鄭德容회장 변호사 鄭在憲회장 등 제씨의 성금으로 매 책 당 600권씩 구입 배포하였다. 기념학술대회의 후원은 鄭遠容 종친회장이 맡았다. ♣ 인륜도덕기강이 진작 된다면 한강선생의 학덕선양 학술대회가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죽헌선조가 회연서원 초대원장 재임 시 편찬한 한강문집을 12대 후손에 의하여 완역의 책무를 감당하고 보니 4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 今昔之感이 없지 않다. 선생몰후 386년만의 쾌거이며 14년 후(2020년) 400주년기념행사를 기획하는 초석을 놓은 셈이다. 아, 이 나라 이시대의 해이된 인륜도덕기강을 다시 진작하는 계기가 되고, 또한 추로지향의 명예를 다시 되 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또 있겠는가하는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다. 여기에 이날 발표된 학술대회의 강연내용을 요약하여 참석치 못한 강호제현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2, 퇴계학맥의 계승과 발전 지난11월1일 성균관대학교 600주년기념관에서 “퇴계학맥의 계승과 발전”을 주제로 개최된 한강집 (寒岡集 鄭 逑1543-1620)과 갈암집 (葛庵集 李玄逸1627-1704)완역기념 학술대회가 민족문화추진회 주최로 개최되었다. 600여명의 유례없는 대청중이 참가한 이날 학술대회는 민족문화추진회 조 순(趙 淳)회장의 개회인사로 시작되었다. 이날 제1부에서는 중앙대학교 유권종(劉權鍾)교수가 [寒岡 鄭逑의 修養論]을 주제로 강연하였고, 단국대학교 김문식(金汶埴) 교수가「16~17세기 寒岡 鄭逑의 地理誌 편찬」을 주제로 강연하였다. 2부에서는 「갈암 이현일의 유학적 삶과 경세론」을 주제로 안동대학교 안병걸 교수의 강연이 있었고 경희대학교 문석윤 교수는「갈암 이현일의 성리설」을 주제로 강연하였다. 종합토론에서는 고려대 이동환 교수의 사회로 이광호 (연세대) 신병주(서울대) 김학수(한국학 중앙연구원) 엄연석(한림대) 교수 등이 토론하였다. 한강과 갈암은 퇴계학맥을 이어 온 16~17세기 대학자로 그 명성이 높다. 3, 한강 정구의 수양론 문목공 한강선생은 1543년에 성주에서 出生하였다. 10세에 大學 論語을 읽었고, 13세에 易傳을 배웠고 21세(1563년)에 퇴계 이황 (退溪 李 滉)선생에 입문하고 24세(1566)에는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강은 일찍이 15세때 경(敬)과 의(義0에 의거하여 심신을 수양하는 원리를 자각하는 대현의 자질을 보였다. 이 날 유권종 교수는 한강의 禮學과 心學의 상호연관을 고찰하면서 성학적(聖學的) 의식 기반을 논술하고 心學的 修養의 요령을「마음」과「敬」「?現」에 근거하여 고찰하고 통합적 기체로서의 心學의 구조를 펼쳐보였다. 한강의 禮의 존재방식에 대한 사고는 예가 道德體現者의 구성원리로서 예와 인간교육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인간의 마음에서 통합되는 구조를 설명한다. 즉「天理를 節文하고 人事에 儀則이 되었으니 그것을 분산시키면 禮儀 3百과 威儀 3千으로 질서가 정연하고 그것을 한군데로 모으면 一身과 一心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서 일찍이 군자의 몸에서 떠난 적이 없으니 道德仁義가 이로서 성취되고 君臣 父子 兄弟의 관계의 구분도 이로서 정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강집 10권1절) 한강의 수양론은 嶺南士林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풍을 이어 갈수 있는 학문적 구조와 방법을「발전」시킨 업적을· 간과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즉 퇴계식 眞摯와 實踐, 居敬과 窮理의 방법 특히 敬과 思에 의한 정밀한 思索과 判斷을 강화하는 동시에 南冥의 敬義爽持의 수양론을 수용하면서 浩然之氣의 기상과 기질의 영향을 받아 發展시킨 것이다. 한강이 體認 體察 體驗 體行등의 方法을 통한 自純熟 自見得을 중시한 점은 퇴계 남명의 聖學精神과 방법을 충실히 계승발전 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한강은 儀禮 禮記 朱子家禮와 五先生禮學節義편찬과 같은 禮學硏究에 몰두하여 儒學禮規를 整理集成하였다. 이때 수하삼현(水下三賢註2)으로 하여금 예설을 교감케 하였다. 한강은 오랜 修練의 결과로 천리의 보존과 인욕의 소멸로 항상 생각과 행위가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인격을 이루었다.敬과 義로 內面的規律과 外面的 行爲가 일치하는 正行君子의 典範이 되어 從心所欲不踰距의 경지에 이른 것은 수양론에 근거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註1)한강의 위기지학은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는 도학으로서 사제가 일체가 되어 실천궁행하였고 門勢가 嶺南과 近畿에 이르렀다. 註2)문하 高弟 가운데서 죽헌선생은 대가천 하류에 계시기에 水下丈이라 부르며 그 학문과 덕량을 찬탄하였고 그 두아들과 더불어 水下三賢으로 하여금 醴說을 校勘케 하였다. 수하삼현은 불천위로 오암서원(鰲巖書院)에 향사되고있다. 4, 11개 地理誌 편찬한 현철한 牧民官 ♣ 咸州誌는 지방지리지의 嚆矢 두번째 주제는 단국대 김문식 교수가 “한강 정구의 지리지 편찬에 관한 연구”를 강론하였다,. 퇴계에 의한 성리학을 전수한 한강은 心學과 禮學에 심취하였고 주자를 흠모하여 東國朱子로 자처할 만큼 朝鮮禮制를 발전시킨 대현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는 지방목민관으로 출사하면서 지리지편찬에 독보적 경지를 개척한 업적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1580년 창녕현감을 시작으로 1608년 형조참판과 대사헌을 마지막으로 환관을 물러날 때 까지 지방관헌으로 외직에서 8개지방의 목민관을 역임했는데 任地마다 그 지방의 지리지를 편찬했다. 그가 지리지를 편찬한 이유는 첫째 그 지방의 지리와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 후대 목민관의 업무에 기여케 하고, 둘째로 유교와 충효를 권장하여 예의와 질서로 지방사회의 풍속을 고르게 하여 신뢰와 안정을 기하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예의범절도 불교식과 유교식이 혼돈되어 그 정본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지리지 편찬에 관심을 보인 것은 지방통치자가 그 지방의 지리 풍속 인물 역사 산업을 모르고는 백성을 옳게 다스릴 수 없다고 믿고 부임 초에 그 지방의 사정을 공부할 자료가 전무한 까닭에서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지리지 관계서적으로는 세종실록의 지리지와 팔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뿐이었다. 이는 전국 개관은 되어도 지방의 상세한 사정은 기록되지 않았다. 16~17세기에는 지방관과 사족들이 지방지리지를 편찬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18세기에 이르러 다시 국가적 지방지리지 편찬이 본격화되는 실정이었다. 한강은 1580년 창산지(창녕현 지리지) 편찬을 필두로 동복지, 함주지, 통천지, 임영지 (강릉), 관동지, 충원지, 복주지(同福誌 咸州誌 通川誌 臨瀛誌 (江陵) 關東誌 忠原誌 福州誌)등의 8개 지리지와 谷山洞庵誌 (雲谷 武夷山 白鹿洞 晦庵 관련기록) 武夷誌 臥龍誌등 3지리지와 합하여 11개 지리지를 편찬하였다. ♣ 지방지리지는 실학사상의 표현 지리지의 서술은 지방편제 인구 문중 인물 역사 산업 사적 풍속 기후에 이르기까지 소상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도 군역을 감당하는 한편 문관과 학자들을 동원하여 지리지를 편찬하여 전란으로 없어진 기록을 보완하기에 심혈을 기울었다. 한강의 실학사상이 지방지리지 편술에서도 돋보인다 하겠다. 한강은 지리지 편찬을 통해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이황, 조식으로 이어지는 조선유학의 학통의 정통적 계승을 강조한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관료학자로서 정구는 학문의 실천방안과 학통의식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하겠다. 백성 다스리는 기본 요체는 그 지방 실정에 정통함에서 출발할진대 지리지편찬은 현철한 목민관의 경윤의 한 단면이다. 그가 편찬한 많은 지리지는 전란으로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함주지는 16세기에 편찬한 지방지리지로 현존한 유일의 것으로서 전범적 존재이다. (갈암집 발표요약은 지면관계로 여기서는 생략 한다.)
최종편집:2025-05-13 오전 11: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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