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을 좋아한다. 산은 오르는 만큼 보여주고 걷는 만큼 땀 흘리게 해서 좋다. 더구나 산은 가식이 없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서 인간사의 잘 잘못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오직 초연한 자세로 인간세계를 내려다 볼뿐 부화뇌동도 하지 않는다. 천금같은 그 침묵 속에서 심해 같은 겸손이 나를 좋아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산은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안식처를 제공해 주어 좋다. 시간에 쫓기는 직장생활, 억눌린 욕구나 불만을 죽이기 위해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한적한 오솔길 혼자 걷노라면 구름과 나무가 벗하자 다가오고 벌, 나비 친구하자 날아온다. 계곡의 맑은 물 쉬어가란 유혹에 두발 개울에 담그면 풍진세상 어디 있나 무아에 빠져든다. 여기에 술 한잔 걸치면 무릉도원이 별 곳이겠는가.
당나라 시성 이태백이 된 기분이 된다.
“그대 푸른 산에 왜 사는가 물으니 마음 한가롭게 웃을 뿐 대답은 않네, 복사꽃 띄워 아득히 물 흘러가니 인간세상 아닌 별천지가 바로 여기인 걸”
그래서 나는 산사람이 되었고, 틈만 나면 산행하기를 좋아한다.
외국 유학에서 갓 귀국해 시차도 극복 못하고 이삿짐도 정리 못한 처지에 불현듯 산에 다녀오겠다니 아내가 놀라 말린다.
그러나 아내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집 가까운 관악산으로 달려갔다. 숯 속 소나무 굴참나무들이 줄지어 반겨준다. 늦가을 뙤약볕이 따갑게 내려 쪼이고는 정적 속에서 여치 쓰르라미의 요란한 협주곡을 들으며 산과 하늘과 구름과 같이 눈 사귐을 할 수 있는 그 멋은 산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멋이 아닌가? 더구나 외국에서 그리던 고향 산에 안기고 보니 마음은 날아갈 듯 상쾌하다.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정신 없이 삼성산길을 오르고 있노라니 저만치 앞서 이순이 갓 넘었을까 여 노인 한 분이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다. 이색적인 복장에다 륙색을 비스듬히 메고 막대기를 짚고 걷는 모습을 보아 하니 분명 초보산행인 것 같다. 그 옆을 앞질러 2백여 보앞에 있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휴식하며 내려보고 있노라니, 그 노인은 숨을 헐떡이며 마침 긴급하게 뛰어내려오는 순경을 불러 “경찰관님, 여기서 삼막사가 아직 멀었어요?”하고 질문을 한다. 그러나 그 순경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멀었어요”하고 휑하니 스쳐 내려간다.
“경찰관님! 경찰관님!”하고 재차 불렀으나 이미 저만치 뛰어간 순경이 대꾸할 리 없고 노인만이 “경찰관이 뭐 저럴 수가 있는가”라고 투덜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난 쓸데없이 욕을 먹는 순경이 안쓰러워 “아주머니(할머니라 하기에는 너무 젊어) 보아하니 삼막사 쪽으로 가시는가 보죠? 저도 그리로 가니 그 륙색을 제게 넘겨주세요.”하고 청했더니 아무 거부 없이 그 륙색을 그대로 벗어 내게 건네주었다. 그 아주머니는 내가 느낀 대로 산행이 처음이었고 서울대 입구에서 만나기로 한 동행을 놓치고 삼막사 쪽에서 개최되는 황해도민의 날 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가고 있는 중이란다. 나는 산행을 예찬하면서 앞으로의 건강을 위해 산행을 시작해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한참을 걸어 산중턱에서 잠시 쉬면서 갖고 간 커피를 나눠 마셨다. 아무래도 이색적인 복색에 호기심이 동하여 “아주머니는 무엇하시는 분이세요?” 하고 물었더니 “작곡을 좀 하지요.”라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한다.
난 너무나 엉뚱한 대답에 그렇다면 자작 곡 중에서 좋아하는 곡이 무엇이냐고 되물었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곡과 대중이 좋아하는 곡이 다르다면서 ‘네잎클로버’라고 했다. 솔직히 난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네 잎 클로버라면 전쟁터에서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해준 행운의 잎이 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더더구나 ‘네 잎 클로버’란 가곡이 있는지는 정말 몰랐다. 그저 음악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요즈음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더 무서운 분이라고 하면서 음악이란 음을 조화 있게 결합시켜 아름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이라고 하던가? 그렇게 해서 황해도민의 날 행사장에 당도하니 먼저 도착한 도민들이 일제히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나는 그 자칭 작곡가의 소개로 구월산 반공유격대장 등 황해도 출신유지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도시락과 기념수건을 받고 보니 본의 아니게 황해도민이 되었다.
점심도시락을 나누어 먹은 후 나의 안내임무가 끝나 물러가겠다고 하니까 그 자칭 작곡가께서 한사코 동행하겠단다. 황해도민이 그렇게 환영하는 것으로 보아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새삼 이름을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손을 맞잡고 삼막사 망해루를 돌아 불성암 옆 한적한 느티나무 밑에 마주 앉았다. 사과를 꺼내 껍질을 깎으려 할 때, 산에서는 보통 남자들이 봉사하는 것이라고 칼을 달라니까, 젊은이는 내가 깎아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된다는 다정스런 모성애를 풍겨낸다.
사과 깎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공직자 이야기, 그리고 우리문화 이야기까지 하고 보니 십 년 지기가 된 것처럼 가까워졌다.
언덕길을 걸으며 네 잎 클로버를 작곡하였다는 그 작곡가는 순간 자기 이름 소개가 없었다며 “나 김 순애 에요, 김·순·애” 하고 두 번씩이나 자기 이름을 반복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했다. 법조문만이 제일인 줄 알고 살아왔던 나로선 음악이나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이 누구인지 정말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작곡가이고 교수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 나는 유학에서 갓 돌아온 법을 다루는 공직자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산길을 휘저으며 삶에 관한 이야기며 분수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자기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용산 고교 앞에 위치한 조그만 주택에서 살고 있으며, 대문을 늘 개방하다시피 하고 있어 좀도둑이 자주 드나든다고 했다. 도둑맞을 물건이 별로 없어 마음은 편하지만 어떤 때는 장롱문이 열리고 집안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을 때는 속이 상할 때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도 남모르게 남을 도와주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해 보기도 하고, 남을 위해 뒷전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황해도민회 회장의 이야기도 귀띔해 주었다. 그 날을 계기로 나는 지금까지 몇 개 고아원과 장애인단체에 매월 후원금을 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서울대 입구에서 안양유원지까지 관악산 종단을 마치고 기약 없이 헤어졌다.
그 후 나는 우연히도 명곡의 고향이란 책 속에서 김 순애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 작곡가였으며 “네 잎 클로버” 이외에도 “그대 있음에” 등 300여 곡의 가곡을 작곡한 원로이며, 이화 베스트 100인 중의 한사람이란 것을 할게 되었다. 몇 년 전 스승의 날에는 원로 스승으로서 KBS TV 화면을 통해 근황을 보았으나 지금은 그 생사조차도 알 수 없이 세월은 흘렀다.
너무나 소박하고 소탈해서 미처 알아보지 못한 여 작곡가였기에 나의 손을 꼭 잡아주며 “미스터 장,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하고는 분수를 알고 최선을 다하는 현대인이 되어달라는 그 부탁의 말씀이 오래도록 긴 여운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