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금상수상작(시)
날아오르다
성주고 3학년 여동현/
이제는 아무도 그 하늘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제는 아무도 자신에게 날개가 있음을 떠올리지 않는다.
분명 하늘을 날았음에도, 분명 그 하늘에서 날개를 펼쳤음에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도 자신이 날 수 있음을 믿지 않는다. 날아오르려는 사람을 이상한 듯 바라보고만 있을 뿐.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지….
하늘은 외롭다. 매일같이 그에게서 춤추던, 날개를 가진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날아오르려 하지 않으므로.
모두가 외롭다. 그 누구도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땅만을 바라보고 있다.
모두가 외로운 것이다.
나만이 기억한다. 그 하늘을, 그 날개를, 그 비상을.
그래서 나
지금
날아오른다.
시를 내놓고 우스갯소리로,
“야~, 이거 상 하나 타겠는데!”
라고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상을, 그것도 금상이라는 큰상을 받게 되다니, 혼이 어디론가 빠져버린 듯한 기분입니다.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해서 무언가 읽은 적은 많습니다만, 그다지 글을 많이 써 본 적은 없을뿐더러, 실력이 그리 대단치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상을 받게 무척이나 기쁩니다.
시라는 건, 다른 문학 장르도 그렇겠지만,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이 상이라는 예외도 있지만)
제게 또다시 시를 쓸 계기가 생길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다시 시를 쓸 기회가 생긴다면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부족한 제게 큰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로 상을 타다니,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고등부 금상수상작(산문)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목걸이
성주여고 2학년 석유미/
갑자기 엄마의 울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유미야, 이제 어떡하니?”
병원 의자에서 자고 있던 나는 엄마의 흐느낌에 잠을 깼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자마자 엄마는 나의 손을 이끌고 어느 병실로 데려 갔다. 그 방에는 작은 아빠와 할머니가 있었고, 언니도 그 속에 있었다. 내가 병실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작은 아빠는 나를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 병실 침대에는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며칠 뒤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난 무슨 잔치를 하는가 보다하면서 많은 사람에, 많은 음식에 신기해하고 있었던 탓이라 어떠한 상황이 내 앞에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그 때였을까, 많은 음식 사이로 아빠의 사진이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아빠 사진이 왜 저기 있지?’
사진에 눈길 한 번만 주고 나는 사촌들이랑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검은 색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많이 왔고 아빠 사진 앞에서 절을 했다. 엄마는 하얀 손수건에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때부터 난 울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그 때처럼 운 적은 없었다. 머리가 아프고 눈물이 메마를 정도로 울어댔다. 작은 엄마가 달랬지만 도저히 소용이 없었다. 어린아이에게도 아빠의 죽음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느꼈었던 걸까? 내 나이 8살. 난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아빠’라는 존재를 기억 속에서 지워야 했다.
아빠의 죽음은 내가 성주에서 새 학기 전학 수속도 마치지 못한 채 일어났다. 그래서 뒤늦게 엄마랑 같이 성주초등학교에 전학 수속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집에서 출발하여 학교로 가는 길이 모두 낯설고 가는 곳마다 온통 새로운 세계에 온 것 같았다.
엄마가 올 때는 혼자 와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지나가는 표지판을 몇 개만이라도 외우기 위해 노력했다. 전학 수속을 다 마치고 나서 친구들이랑 인사하며 전학 첫 날을 그럭저럭 보냈다. 하교 종이 ‘땡’치자, 친구들은 끼리끼리 모여 나갔고 난 혼자 교문을 벗어났다.
‘이 길인가? 아니야, 저 길이야.’ 횡단보도를 몇 번이나 건너고 다시 되돌아오고, 아까 외웠던 표지판들을 기억해서 어렵게 집에 도착했다. 그 때부터 친구들보다 먼저 나 스스로 세상을 밟아 나가야 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 때이었다. 선생님께서 갑자기 학생들에게,
“집에 자동차가 있는 친구는 손들어 보세요.”
내 옆에 있는 친구들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고 나서,
“아니면, 오토바이가 있는 친구는 손들어 보세요.”
친구들은 옆에서 손을 들고 있는 데 나 혼자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여러분, 유미 친구는 자동차도 없고 오토바이도 없답니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유미에게 박수!”
처음이었다.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선생님께서는 아빠 없는 내가 혹시나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될까봐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셨고, 선생님의 이런 관심덕분에 친구들의 투표로 부반장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초등학생인 나에게는 가족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식은땀을 가장 많이 흘리는 시간이었다. 3학년 때, 가족 그림그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생님께서 나와서 가족 소개를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계속되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그림을 들고 나갈 수가 없었다. 아직은 아빠의 부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4학년 때도, 5학년 때도, 6학년 때도 가족 이야기하는 시간은 왜 이렇게도 많은지……. 엄마가 걱정할까봐 티도 못 내고 혼자 많이 울었었다.
언제였을까. 아마도 중학교 2학년 때쯤이었다. 아빠를 떠나보낸 지 8년이 되던 해였다. 아빠와 8년을 살았고 8년을 아빠가 없는 채로 살아서 이었는지 이제는 아빠의 부재에 대해서 무덤덤해졌다.
그 전에는 신학기 처음으로 작성하는 학생신상기록표를 친구들 안보이게 손으로 가리면서 적었는데, 중2때부터는 친구들 신경 쓰지 않고 적었다. 키가 컸었던 탓인지 마음도 자랐고 아빠에 대한 생각에도 한 그루의 나무가 자랐는가 보다.
내가 고등학교로 진학하던 해에 갑자기 엄마가 반지 하나를 보여주셨다.
“생전에 아빠가 끼고 다니던 반지란다. 너희들에게 크면 아빠의 유품으로 무언가 해 주려고 했는데 이제 그 때가 된 것 같구나.”
반지는 크고 예뻤다. 엄마는 그 반지로 언니와 나에게 목걸이를 만들어준다고 이야기 하셨다. 그리고 한 달 뒤, 엄마는 자그마한 상자를 언니와 나에게 하나씩 주셨다. 상자를 열어보니,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그 목걸이를 걸고 거울을 보았다. 내가 보았던 모습 중에서 가장 예뻤다. 그 때부터는 늘 하늘에만 있던 아빠가 나와 함께 하는 것 같아 가슴 설레기도 하고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가끔은 친구가 자랑스럽게 아빠 이야기하는 것이 부럽고, 가끔은 기숙사에 들어갈 때 짐을 들어주는 친구의 아빠가 부럽고, 가끔은 도서관을 나갈 때 아빠가 마중 나와 있는 친구가 부럽지만, 난 만족한다. 비록 보고 만질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아빠는 항상 내 목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할 수 없기에 난 그 누구보다도 아빠를 더 많이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도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아간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빠를 목에 걸고…….
선생님께서 수상 소식을 이야기 하셨을 때, 가장 먼저 한 말은, “제가요?”이었다. 수상 소식에 놀래서 잠깐 동안은 정지한 상태에 있었다. 그래도 상을 받게 되어 무척 기분이 좋았고, 그 제목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목걸이’라서 나에게는 더 뜻 깊은 상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고 한다. 병도 몸소 앓아야 치유할 수 있듯이 우리도 시련을 겪음으로써 또 다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와 같은 친구들이 이 글을 보며 오히려 지금 찾아온 시련들이 나를 일으킬 희망의 빛줄기라 생각하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기를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