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19일 나는 연대 본부 1과(인사과)에 배속되었다. 대구사범대학에 재학 중인 황두석하고 나, 두 사람이 필경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력서의 글씨를 보고 뽑은 것이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줄판 위에 원지를 놓고 뾰족한 철필로 긁어서 등사하는 일을 담임 선생님한테서 배웠기 때문에 필경은 낯선 일이 아니다. 인사과에는 이번에 신병이 다섯 사람 들어왔다. 1951년 1월 1일 연대에서 예하 각 부대에 보내는 공문은 모두 등사물로 내려간다. 황두석은 나보다도 글씨가 더 능숙해 보인다. 일이 밀리면 밤을 새워서라도 맡겨진 것은 어김없이 해냈다. 그렇게 해서 상사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게 되고 보니 군대 생활도 재미있는 데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밤중에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사무실의 모든 사무 집기와 서류를 트럭에 싣고 후퇴 길에 올랐다. 21연대가 춘천에서 병력 보충을 받아 가지고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1주일 이상을 버티어 봤으나 중과부적으로 또 후퇴하게 된 것이다. 1951년 2월 4일 후퇴 작전에 있어서는 연대 본부가 항상 제일 먼저 퇴각하기 때문에 크게 위험을 겪지 않고 여기 원주까지 후퇴했다. 원주 시민들은 집을 다 비워 놓고 피란하고 없었다. 주인 없는 집의 돼지우리에서는 돼지가 배가 고파 꿀꿀거리고 있었고 빈방에다 축음기니 재봉기 같은 가재 도구를 그대로 두고 간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다급하게 집을 비우고 나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연대 본부가 자리잡은 건물 가까이에 원주기독도서관이 있다. 책은 고스란히 서가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연대 본부의 새로 들어 온 행정병들은 모두가 학생들이라 책을 보더니 욕심이 나서 제각기 욕심껏 책을 뽑아 가지고 왔다. 고참 하사관들은 좀 잘 살아 보이는 집에 들어가서 재봉틀 대가리, 축음기, 골동품 같은 귀중품을 훔쳐 가지고 나왔다. 국민학교 교사 출신의 박지환 중사는 어디에서 풍금을 하나 가지고 와서 트럭에 실어 놓고 애국가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아니라 마치 국민의 재산을 약탈하는 도둑으로 변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인민군이 들어오면 어차피 다 없어질 물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지금 이 시간에 전방에서는 피투성이가 되어 적의 남진을 저지하고 있는 전우들이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짓들이다. 이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전쟁에 이기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전술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적에게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1년 2월 15일 또 후퇴 명령이 내렸다. 각자의 관물함을 트럭에 실었다. 관물함이 두 배로 늘어났으니 트럭은 관물함으로 가득 차서 정작 사람이 탈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것을 본 오원봉 선임하사가 뿔이 머리끝까지 돋아서는 관물함을 모두 내려놓으라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는 관물함을 직접 검사했다. 전투에 불요불급한 사물은 다 버리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가지고 온 책, 풍금, 축음기, 재봉틀 대가리 등을 모두 그 자리에 내려놓고 트럭에 올랐다. 각 사람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던 탐심(貪心)이 관물함의 뚜껑을 열면서 드러난 것 같아 모두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선임하사는 자기의 관물함도 열어 보였다. 군에서 지급된 내의와 양말 같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분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소경의 손을 붙잡고’ -혼돈의 시간- 중에서
최종편집:2025-05-16 오후 01: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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