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에게나 태어나서 자라난 곳이 있고 살면서 보낸 시간이 있다. 우리들 세대는 서로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별로 긴요(緊要)하지도 않는데 고향을 묻기 일쑤다. 그것은 근원에 관한 동질감을 서로 확인하려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표시일 것이다.
고향이란 말에는 개체적(個體的)인 뜻과 공동체적(共同體的)인 뜻이 있다. 전자는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을 말하며, 후자는 조상 누대로 세거(世居)하며 살아 온 곳을 말한다. 우리같이 농경사회를 이룩하며 살아온 민족에게는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 온 고향의 뜻이 바로 우리의 생명이며 애정의 전부였다.
나와 동년배이거나 그 이상인 사람들에게 고향을 물으면 응당 조상 누대(累代)로 살아온 고장을 일컫는 것으로 알았으나,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만을 고향으로 알고 있다. 또한 고향을 묻는 뜻을 알만한 경우도 아버지의 고향과 자기의 고향을 구별하여 반문(反問)한 후에야 대답을 한다. 조상 누대로 살아온 아버지의 고향과 자신이 출생한 장소인 고향을 구별해야 되는 의식구조에서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각박한 현실을 다시 확인함과 동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뿌리를 망각하고 소중한 우리 것을 저버리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고 슬프다. 어찌 보면 이런 사람들은 마음의 고향까지 잃어버린 진짜 실향민들이 아니겠는가.
우리들 세대에서는 고향의 흙만 보아도 그 속에 엉켜있는 조상의 핏줄을 느끼는 진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으나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는 향수인 것 같다. 북녘 땅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들이 실향민으로 자처하며 망향의 그리움을 달래는 행사나 모임을 볼 때마다 진정한 실향민은 그들이 아니라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린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아닐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난다.
고향을 오고 갈 수 있다든가, 그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는 사실보다 마음의 고향을 간직하고 가꿀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고 느껴진다. 고향에 갈 수 없다는 현실에서 망향의 그리움과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실향민이 아니다.
산업화의 물결에 따른 도시집중현상과 핵가족 단위로 변해가는 가족구조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서구문물의 수용으로 소중하고 알뜰한 우리의 것들을 버리고 망각(忘却)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공동체로서의 고향의 뜻은 버려진 지 오래이다. 자기가 태어난 곳이란 고향의 의미도 자기가 출생한 장소라는 사실적 의미밖에 없는 현실을 보면, 얼레에서 실이 떨어져나간 연과 같이 미아(迷兒)가 되어 가는 느낌이 든다. 그것도 아주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미아 말이다.
나의 경우도 아이들 교육과 생활의 터전을 따라 고향을 떠난 지 30년이 넘었다. 이제는 고향이 타관(他關)이 되고 타관이 고향이 되어간다. 그러나 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불현듯 코끝이 시려오고 지나쳐버린, 돌아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엇갈리고 새삼 자신을 돌아보며 옷깃을 여민다.
고향은 조상의 뼈가 묻혀있고 얼이 담긴 곳이며, 참되고 올바른 사람이 되라는 유훈과 바람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고향은 우리들의 근원이요 뿌리이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서 사는 것을 우거(寓居)라 한다. 임시로 몸만 붙여서 산다는 뜻이다. 소중한 마음과 정신은 고향에 두고 호구(糊口)를 위하여 부득이 몸만 떠나서 살고 있다는 이 말에서 불씨 같이 고향에 묻혀있는 정신의 소중함을 알 듯 하다.
고향에 묻혀 있는 소중한 정신은 무엇일까? 표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집약(集約)하면 ‘참되고 올바른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마음가짐과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고향을 사랑, 희망, 용기, 역사, 추억, 은혜가 융합(融合)된 추상적인 의미라고 본다.
비록 직장을 따라 도시를 전전하거나 실향의 아픔을 안고 살아갈지라도 고향 땅에 묻혀 있는 그 소중한 정신을 받들고 유훈을 되새기며, 작은 것이나마 우리의 것을 소중하게 가꾸고 감사하는 사람은 마음의 고향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격증(激增)하는 청소년 범죄와 탈선, 패악(悖惡)한 행동의 근원적인 이유가 이러한 마음의 고향을 잃고 실향민이 되어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고향을 간직하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가짐에서 싹튼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며, 식물도 뿌리가 넓고 깊게 자리할 때 충분한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아 무성한 잎과 가지로 짙은 녹음을 만들고 심한 눈보라나 비바람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에 고향을 기리고 가꾸어 나의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키우며 어머니의 젖무덤 같은 마음의 고향을 간직할 때 사랑과 용기와 희망과 신념을 가지고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세대들은, 휴가를 즐기면서 향락(享樂)에만 젖어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연과 유적에서 조상의 숨결을 더듬어 보면서 조상이 흘리신 땀과 눈물과 피의 숭고한 뜻을 가슴에 되새기며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으로 소중한 우리의 전통과 습속을 가꾸는 것이 바로 마음의 고향을 심고 가꾸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사소한 작은 것이라고 치부할지 모르나 동짓날 팥죽을 끓여 나이 수에 맞추어 찹쌀수제비를 먹는 우리의 고유한 풍속을 체험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된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만행(萬行)의 근원이란 가르침을 일깨워주는 것들이 바로 젊은 세대들에게 마음의 고향을 심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산업사회의 일원인 우리들은 생존을 위하여 생활 터전을 찾아 동분서주하며 편의와 실리를 좇아가며 살아가야 하는 세대이다. 그래서 고향에 종착(終着)하여 생활하면 자칫 인생의 낙오자로 생각해버리기 쉽다. 고향을 떠났다는 사실은 출세와 성공의 문턱에 들어섰다고 동경(憧憬)하는 처지이고 보니 타향에 정들여 가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어디든지 몸만 붙여 살 수 있으면 그만인 세태에 젊은 세대들은 갈수록 실향민이 되어 가는데 그들의 마음에 고향을 심어주고 현실의 어디서나 마음의 고향과 만날 수 있게 함으로써 아무리 거센 세파라 하여도 그들을 다소곳이 잡아주고 이끌어 줄 마음의 고향을 찾아 주어야겠다. 그렇게 되면 뿌리 없는 부초(浮草)처럼 떠돌며 방황하지도 않을 것이며, 용기와 희망과 신념을 가지고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