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의 형태는 신라시대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관녀(天官女)에 관한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파한집(破閑集)》에 실려있는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김유신은 계림(鷄林) 사람으로 그가 이루어 놓은 혁혁한 업적은 국사에 기록되어 있다.
평소에 어머니가 방탕하지 말 것을 엄하게 가르쳤는데 어느 날 그는 기생집에서 자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이를 알고 꾸짖기를, “나는 이미 늙었지만 네가 자라서 공명을 세우고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 서 영예로운 자식이 되기를 밤낮으로 축원했는데, 이제 네가 백정의 아들들과 몰려다니면서 기생집과 술집 출입을 하느냐?”라고 하면서 슬피 우니 김유신이 곧 어머니 앞에서, “이후로는 결코 그 집 문 앞도 지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굳게 맹세했다.
김유신이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인데 말이 예전에 다니던 기생집으로 잘못 들어갔다. 기생은 원망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맞아들이려 하니, 김유신은 정신이 바짝 들어 탔던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팽개친 채 돌아왔다.
이에 기생이 원한에 사무친 노래 한 곡을 지었다. 경주에 천관사(天官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이 곧 그녀의 집이었다고 한다. 천관이란 그 기생의 호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설에는 천관이 기생이 아니라 신당(神堂)의 무녀 (巫女)는 설이 지배적이다. 천관사의 사지(寺址)는 경주시 교동 오릉 (五陵)과 장두산(檣頭山) 사이에 있는데 사적 제 3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천관사의 터에는 탑의 파편이나 초석이 남아 있다.
이 절은 김유신이 삼국을 통일하고 경주에 돌아와서 자신을 연모하다가 죽은 천관녀를 위해 세운 절이기 때문에 통일신라 초기의 것이다. 이 절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까지 남아 있었 다.
고려시대 이공승(李公升)은 천관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
천관사란 절 이름에는 옛 사연이 있었는데
홀연히 그 유래를 들어 보니 처연(悽然)하구나.
정이 많은 공자(公子)가 꽃 아래에 놀았는데
원한을 품은 가인(佳人)은 말 앞에서 울었다네.
말은 정이 있어 옛길을 알고 찾아갔건만
하인은 무슨 죄가 있어 채찍을 맞았는고.
다만 묘한 한 곡조의 가사만이 남아 있어
달빛과 함께 잠들었지만 만고에 전해지고 있구나.
- 이공승,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