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귀향은 노년에 안거(安居)하여 낭만적인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한 일반적인 귀향과는 거리가 멀다. 제목을 ‘귀거래(歸去來)’가 아닌 ‘귀향’으로 삼은 것도 ‘새는 옛 숲을 생각하고(鳥戀舊林), 고기는 옛 연못을 생각한다(池魚思故淵)’는 도연명의 감상적인 귀거래(歸去來)와는 구별하기 위함이다.
학업과 직장을 따라 40여년을 도시에서 떠돌며 지냈다. 하찮은 욕망과 편의와 기능의 포로가 되어 줄타기하듯 위태롭게 살아오다 공직을 마무리하면서 귀향했다.
평소 귀향의 뜻을 밝히면 한 번 해보는 말이려니 여길 뿐, 많은 고뇌의 시간을 보낸 후 신중하게 내린 결단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귀향의 첫 번째 동기는 자연에서 배우고 조상님의 품속에서 유훈(遺訓)과 덕업(德業)을 되새겨 깨우치며, 남은 삶을 부끄럽지 않게 여미고 가꾸어야겠다는 때늦은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두 번째 동기는, 막중한 불천위(不遷位) 주손(孫)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고향의 종택(宗宅)과 사당(祠堂)의 신주(神主)를 버려 둔 채 타관으로 떠돈 40여년간을 죄짓고 쫓기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그동안은 현대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
제나마 시대에 걸맞은 주손으로서의 소임에 충실하기 위해서이다.
다음으로는, 내가 정성과 노력을 다하면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느낄 것이며 그들 나름대로의 다짐과 준비를 하게 될 것이란 기대와 믿음이 세 번째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귀향 결단에는, 아들 하나를 종가(宗家)에 바치고 당신들의 삶을 아들과 종가를 위하여 희생하신 생가 부모님 양위분(兩位分)과, 평생을 올곧게 선비의 삶을 지키신 족조(族祖) 극암(克菴) 할아버지의 가르침과 깨우침이 원동력이 되었다.
외동아들을 큰집(大宅)에 승종(承宗) 시키고 밤새워 흐느끼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언제나 나의 뇌리에 각인(刻印)되어 흐트러진 몸가짐을 바로 잡아주는 굳건한 버팀목이 되었다.
“네가 잘하면 우리 내외도 빛이 나고 네가 잘못하면 우리 내외도 조상님께 죄인이 된다.” 하시며 철없는 열네살의 어린 나에게 당부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때로는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언제나 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훌륭한 길잡이 역할도 했다.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너나없이 우리들의 생활은 가난했고 여유도 없었다. 우리 집 고택
(古宅) 또한 비가 새고 벽이 허물어졌다. 내가 감당하기엔 힘이 미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중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침(正寢, 안채)을 허물어 버려야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편으로 극암 할아버지의 (克菴, 諱 / 基允) 부르심을 받았다.
“너의 집 정침을 헐어버리겠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느냐?”시며 극암 할아버지는 꼿꼿하고 단아(端雅)한 모습으로 나를 추궁하셨다. 나는 나의 심정을 곁들여서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그제사 조금 누그러진 모습으로 말씀하셨다.
“한개 대감댁은 너 개인의 집이 아니다. 한개를 방문하는 분들은 너희 집 문호(門戶)를 보기 위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너희 집 문호는 성산 이씨(星山李氏) 전체의 자랑인데 네가 정침을 허문다는 어리석고 망측한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냐.”
그날 극암 할아버지는 나를 엄하게 꾸짖으시면서도 격려하고 다독거려주셨고 아울러 큰집을 지키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일러주셨다.
그때 나의 경망(輕妄)하고 무책임한 언동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할아버지의 꾸짖음과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다시는 그와 같은 생각과 언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물러났다.
이후 극암 할아버지로부터 올곧은 선비의 자세와 몸가짐, 자손을 훈육(訓育)하는 방법, 가정을 다스리는 기본을 익혀서 내 가정을 이끌고 내 자식을 가르치는 본보기로 삼으려고 노력했으나 나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극암 할아버지는 나에게 존모(尊慕)와 공경(恭敬)의 대상이었으며 내 삶의 길잡이였다. (2007. 공수래 공수거 중에서)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