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 배양으로 방향 전환, 무력 항쟁과 옥중 투쟁 전개
□군자금 모금 사건
1921년을 고비로 국내외의 독립운동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국제적 여건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분열과 대립도 점차 심해졌다.
1925년 봄, 북경에서 이회영과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강구하던 심산은 일본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실력을 배양하고 무력으로 일제와 싸우기로 했다. 만주와 몽골 접경의 수원에 황무지 3만 정보를 얻어내는데 성공한 심산은 20만 원 정도로 예산을 잡고 모금활동을 벌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국내로 잠입했다. 행동대원을 전국 각지로 파견한 심산은 직접 영남지방으로 뛰어들어 동분서주하다가, 울산에서 버스 추락사고로 친척집에 잠복, 요양하기까지 했다.
3·1운동을 지난 지 겨우 6, 7년 뒤 국내 일반 민심은 독립에 대한 열의가 거의 식은 듯 했고, 많은 재산을 가진 부호일수록 비협조적이었다. 모금에 나선 젊은 동지들이 그들을 권총으로 협박까지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진주의 어느 부호는 사람을 시켜 총독부에 알선해 주겠다며 심산에게 전향을 권유하기도 했다. 심산은 "친일 부호들의 머리를 베어 독립문에 달지 않고는 우리의 독립이 달성되지 않을 것"이라고 분노했다.
일제가 수상한 기미를 눈치 챈 듯 날로 감시망을 좁혀오고 있어, 심산은 국내에서 더 이상의 활동이 불가능 했다. 심산은 다음을 기약하며 부득이 출국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범어사에서 국내의 동지들과 마지막 회합을 하며 심산은 자기의 심경과 함께 앞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전환을 표명했다. 모금의 실패원인은 민심이 죽어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일제의 위장된 `문화정치`에 매수된 지식층과 주구화된 식민지 관리 및 일부 부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독립운동에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을 통감한 심산은 앞으로의 실행계획을 제출했는데, "먼저 일제 총독하의 모든 기관을 파괴하고, 다음 친일 부호들을 박멸하고, 그리하여 민심을 고무시켜 일제에 대한 저항을 다시 불붙게 한다"는 것이다.
심산의 국내잠입 모금활동 사실이 탄로되어 유림의 피검자가 6백여 명에 달했는데, 이것이 소위 `2차 유림단 사건`인 바, 일제는 기필코 심산을 체포하려 했다.
□나석주의거 사건
상해로 돌아온 심산은 이동녕, 김구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모금해온 돈으로 청년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토록 했다. 심산은 유자명과 상의하여 무기를 구입한 뒤 그와 함께 북경으로 가서 의열단 단원 중에 일을 맡길만한 사람을 골랐다.
한봉근·나석주·이승춘 등을 만나 봤다. 이들은 모두 강개한 애국청년으로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심산은 무기와 자금을 나석주 등에게 건네주면서 "독립운동의 역사 위에 영원한 빛이 되라"고 격려했다. 나석주 등은 즉시 위해위로 가서 해로로 입국하기로 했다. 이것이 1926년 5월이었다. 그런데 7월이 될 때까지 마땅한 입국방법을 얻지 못하자, 나석주 혼자서 무기를 휴대하고 서울로 잠입했다.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뒤 권총으로 동척사원 및 경찰 간부 등 일본인 여러 명을 쏘아 죽이고, 추격하는 일본 경찰과 교전 중 마지막 수단으로 자결을 택했다. 다른 두 사람이 동시 입국하여 더 많은 파괴 활동을 하지 못해서 대단히 유감이었지만, 나석주의 장렬한 행동은 국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함께 새로운 용기를 일으켜 주었다. 심산은 이 무렵 의열단의 고문직을 수락하고 계속 파괴활동을 지도했다. 심산은 이제 실력행사에 의한 파괴 활동으로 독립을 앞당기기 위해 떨쳐 일어선 것이다.
□옥중 투쟁
1927년, 독립운동 활동 중에 지병이 악화되어 치료를 받던 심산은 맏아들 환기의 사망 소식
을 접한다. 국내에 보냈던 맏아들이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출옥 후 바로 사망한 것이다.
그 충격으로 지병이 더욱 악화된 심산은 상해공동조계의 공제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심산을 추적하던 일제는 첩자를 통해 심산의 신병을 파악하고 드디어 입원 중이던 병원에 들이닥쳐 체포했다. 이 후 부산을 거쳐 대구로 압송된 심산은 고문하는 자들에게 꺾이지 않는 독립의지를 시로 썼다.
조국의 광복을 도모한지 십여 년
가정도 목숨도 돌아보지 않았다
뇌락한 나의 일생 백일 하에 분명하거늘
고문을 야단스럽게 벌일 필요가 무엇이뇨
(고문하는 자들에게)
이 시를 읽은 일본인 고등과장은 심산의 기개에 감복, 절까지 하며 존경심을 보여 고문이 주춤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일제는 그의 의지를 꺾고자 계속적인 고문을 가했다. 고문의 와중에 심산의 병세는 점점 깊어져서 수시로 의사의 치료를 받았으며, 혼절하여 사경을 헤맨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심산은 당당히 맞섰으며, 무료변론을 자처하는 한국인 변호사도 거절했다.
"나는 대한사람으로 일본의 법률을 부인한다. 만약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된 일인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히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라고 항변했다.
1928년, 결국 14년형을 받은 심산은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했다. 옥중에서도 심산의 투쟁은 꺾이지 않고 이어졌다. 일본인 전옥에게 절을 하지 않았고, 읽기를 강요하는 최남선의 「일선융화론」을 찢어버리는 등 극한 투쟁으로 일관 했다. 이와 같은 심산의 의지를 일제도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출옥 후의 활동
1934년, 병이 위독해지자 일제는 가출옥을 허용하였다. 1929년에도 병이 위독하여 형집행정지로 가출옥 되었다가 재수감 된 일이 있었다. 출옥 당시 이미 중병을 얻어서 불구의 몸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벽옹(앉은뱅이 노인)`이라고 부르자 스스로도 이를 별호로 썼다. 그러나 불굴의 저항정신은 전혀 위축되지 않아서 가출옥의 감시 상태에서도 투쟁은 부단히 계속됐다.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끝까지 거부한 심산은 대구, 울산의 백양사 등지에서 요양을 하면서 한용운, 홍명희, 정인보 등 민족적 양심을 지켜온 분들과 비밀리에 서신을 주고받으며 뜻을 함께 했다.
다음은 홍명희에게 보낸 시 한 구절이다.
벽초(홍명희의 호)의 얼굴 본적 없어도
벽초의 마음 잘 알고 있네
만나보지 못함이 무슨 한 되리오
그대 마음 곧 내 마음인 것을
한용운은 "나는 심산의 마음을 알고 있다. 심산의 얼굴은 몰라도 좋다"라는 글을 보내오기도 했다. 심산은 이때까지 이 세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와도 대면한 적이 없었다. 만날 형편이 못됐지만 굳이 만나보아야 할 일도 아니었다. 그 정신을 알기 때문에 곧 동지가 되는, 세속적인 관계를 뛰어넘는 격 높은 교우였다. 바로 마음으로의 사귐이라 하겠다.
1940년 일제의 감시가 다소 완화됐다. 마침내 고향집을 찾아 어머님의 묘막으로 가서 2년간 시묘를 했다. 어머님 돌아가신지 실로 20년만의 일이다. 망명지 상해에서 모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도 돌아와 시묘를 할 수 없었던 아들의 마음과 그동안의 경과를 어머님 묘 앞에서 고하고 심정을 다 쏟았다.
1943년 심산은 차남 찬기를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했다. 차남이 혁명사상을 품어 여러 번 투옥되었기에, 망명을 시켜 일본 경찰의 미행과 감시를 피해서 활동하게 한 것이다.
몸은 불구가 됐어도 정신은 대쪽같이 곧고 강했던 심산은 태평양전쟁 중에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에 다시 남한 책임자로 참여했다. 건국동맹은 44년 8월에 서울에서 여운형을 중앙책으로 조직된 것으로, 불언(不言)·불문(不文)·불명(不名)의 3대 철칙 아래 민족적 양심이 살아있는 인사를 망라하여 공장·회사·학교·대중단체에 세포조직을 확대시켜 가면서 일제의 패망과 민족의 해방에 대비하고 있었다. 심산은 비록 실질적인 활동은 할 수 없었지만 당시 이 나라 전체를 통하여 민족적 양심의 대표적 존재로서 그의 참여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초, 건국동맹 결성의 사실이 노출되어 일경에 체포됐다. 왜관으로 이송, 수감되어 있던 중 드디어 해방의 소식을 듣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