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상림을 지날 때는 언제나 겨울
잿빛 가지들만 보고 지나쳤다
그 오랜 숲은 지치고 우울해 보였다
길가 벚나무들 방글방글 꽃피울 때도
숲은 멀뚱하니 바라만 보았다
또 봄이야 우린 이제 지겨워
늙은 나무들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보름 만에 다시 상림을 지났다
아니, 지나지 못하고 거기 우뚝 섰다
아, 천년 묵은 그 숲이 첫날처럼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시커먼 고목 어디에서 그렇게 연한 피를 숨겼는지
병아리 부리 같은 새잎들이 뾰족뾰족 각질을 뚫고 나왔다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 톡톡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온 숲에서 달콤한, 솜털 뽀얀 아가 냄새가 났다
봄바람은 요람인 듯 가지를 흔들고
새잎 아가들은 연한 입술로 옹알이를 한다
참, 그만 모든 것 내던지고 싶은 이 만신창이 별에서
숲은 무슨 배짱인지 또 거뜬히 봄을 시작한다
환장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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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시인의 말대로 '만신창이 별'이 됐다. 곳곳에서 전쟁과 학살이 자행되고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가 위험 수위를 넘어 진행되고 있다. 이 모두 물질적인 탐욕을 채우기 위한 배타적 경쟁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 별의 한 모퉁이 숲으로는 어김없이 봄은 찾아와서, '천 년 묵은 숲'이 다시 아기처럼 태어난다. 나고 죽는 것이 사람의 일이고 자연의 섭리임을 아는 시인은 신생(新生)하는 상림 숲의 아름다움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고, 겨울과 봄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시인이 이 '만신창이 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도 겨울 속에 봄을, 죽음 속에 생명을 잉태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림숲은 시인의 따뜻한 언어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배창환(시인·성주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