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7일. 서울 시내는 대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피란 길에 나선 시민들은 한강교를 향해서 몰려가기 시작했다. 서울역은 많은 군중이 쇄도하여 수습할 수 없는 대혼란에 빠졌다. 열차 타는 것을 포기한 군중은 도보로, 자전거·화물차·우마차·자동차·손수레 등으로 가져 갈 수 있는 물건은 다 가지고 남하를 시작하여 거리는 사람과 차량으로 온통 메워져 있었다. 중앙청 등 서울 시가에 무차별 기총 소사를 하고 있던 인민군 비행기를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 격추시켰다. 이런 가운데 `의정부 탈환`이라는 라디오 뉴스가 방송되고 벽보가 나붙었다. 이것을 전해 들은 시민들 중에는 "역시 아침에 수원으로 천도한다던 뉴스는 오보였구나" 하고 안심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 "국군은 적의 전차를 막을 방법도 없고 파괴할 수 있는 장비도 없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리고 포성이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던 오후 3시경에는 "맥아더 사령부의 전방 지휘소가 수원에 설치되었다. 내일 8시부터는 미군이 지원에 나설 것이니 당황하지 말라"는 희소식이 라디오에서 나왔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 말을 믿고 주저앉아 있어야 할지 피란을 가야 할지 우왕좌왕하게 되었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어떻게 하라는 어떤 지시도 내리지 않은 채 엉터리 같은 뉴스만 보도하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며 하루를 보낸 밤 11시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이 수원으로의 천도에 관한 담화와 국민의 분발을 요망하는 녹음방송이 흘러 나오고 있는 가운데 시민의 귀에도 총성이 확실하게 들려 왔다. 그런데도 라디오는 `우리 국군의 승리`를 방송하고 있었다.   포성이 더 가깝게 들려 오자 거리에는 또다시 피란민이 넘쳐흐르듯 남하하기 시작했다. 주간보다 더 복잡하여 차도 사람도 나갈 수가 없었다. 이 무렵 "인민군이 대전·군산·김천·원주 등을 점령했기 때문에 피란을 가도 소용없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이 때문에 피란을 단념하는 사람도 많았다.   한편 이날 아침에 채병덕 참모총장은 미 고문단에게는 한마디의 통보도 없이 육군본부를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로 옮겨 버렸다. 이에 놀라서 뒤따라 내려간 고문단의 라이트 참모장은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서울로 복귀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채 참모총장 이하 주요 참모와 고문단은 이날 오후 6시에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시흥에서 서울로 되돌아온 라이트 참모장은 고문관들이 이틀 밤이나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일부 요원을 숙소로 보내어 잠을 자게 했다. 라이트 참모장은 서울이 아직도 안전하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부참모장인 그린윗드 중령도 잠을 자고 있었는데, 작전국의 고문관 세드배리어 소령의 전화로 잠에서 깨어났다. "한국군이 한강 다리를 폭파하려고 한다"라는 보고 내용이었다. 세드배리어 소령이 김백일 참모부장에게 "부대와 보급품·장비 등이 한강 이남으로 도하하기 전까지는 다리를 폭파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 보고를 받은 그린윗드 중령은 깜짝 놀랐다. 한강교는 한강에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다리이고, 한국군의 안위와 진퇴가 이 다리 하나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강교의 폭파에 관해서는 미 고문단과 채병덕 참모총장 사이에 "적의 전차가 한강교 근처에 접근한 것을 육군본부가 확인했을 때 폭파한다"고 이미 결정해 놓고 있었다. 그린윗드 중령이 황급히 육군본부로 달려가 보니 김백일 장군은 "국방차관이 28일 0시 30분에 폭파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지금 곧 폭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에 제2사단 이형근 장군이 와서 제2사단의 병력과 장비가 아직 시내에 남아 있으니 폭파를 연기해 달라고 건의 했다. 이때 채병덕 참모총장은 이미 한강 남안에 있었으므로 대신 김백일 참모부장이 육군본부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김백일 장군은 이형근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여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를 중지시킬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장 대령은 지프차로 한강교까지 가려고 했으나 도중에 도로가 피란민으로 메워져 있어 빨리 갈 수가 없었다. 장창국 대령이 한강교까지 겨우 150m 정도를 남겨 놓은 지점에 다다랐을 때 커다란 섬광과 함께 대폭음이 들려 왔다. 약 10분 후 두 번째 대폭음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예정 시간보다 45분 후인 28일 02시 15분에 한강교는 폭파되고 말았다. 당시 다리 위에는 3렬로 뻗은 차량과 피란민이 섞여 남하하고 있었으며, 다리 북쪽의 큰길은 8렬로 늘어서 있는 차량·포차·군대·피란민 등으로 뒤섞여 몸을 움직일 수 조차 없는 상태였다. 이 폭파로 피란민·군대·차량할 것 없이 모두 교각과 함께 날아가 버렸고, 500~800명의 인명이 희생된 한편 한국군 주력의 퇴로가 차단되고 말았다. 한강교가 폭파되자 피란민들은 나룻배와 뗏목으로 도강하기 시작했는데 절망한 나머지 한강에 투신자살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한강교가 폭파되자 다리 근처에는 철수해 온 국군과 피란민으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라" 이스라엘 야드바쉡(신의 손길) 독립기념관 지하에 있는 `꺼지지 않는 불` 앞에 있는 글귀이다. 아, 어찌 우리 잊으랴, 6·25 이날을!
최종편집:2024-05-21 오후 01: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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